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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y/사회복지

한국사회복지의 역사(공공부조를 중심으로) part1

by 망고를유혹하네 2023. 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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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복지의 역사 (공공부조를 중심으로) part1

 

 

한국 사회복지는 역사적으로 볼 때, 크게 궁핍한 백성을 국가가 돌보아 주는 궁민진휼의 구빈사업과 풍수재해 등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빈곤해진 이재민들을 구제하는 재해구호사업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1) 삼국시대

삼국시대 백성들은 재난을 피해 안전한 정착지를 찾아 무리를 지어 배회하였다. 반면 삼국시대의 왕들은 농업에 종사할 노동인력과 국방을 위한 병력을 확보하기 위해 인구증가정책을 시행하였고 이러한 목적을 위해 국가에서 구빈정책을 적극 추진하였다.

고구려 고국천왕은 194년 진대법(賑貸法)을 실시하였다. 매년 37월 사이에 가구수(家口數)에 따라 관곡(官穀)을 대여하고 추수기인 10월에 회수하는 궁핍한 농민들에 대한 구휼책이자 다른 한편으로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진대법의 실시는 왕권에 대항하는 세력들과 농민들과의 결탁을 저지함은 물론, 농민들을 적극적으로 포섭하려는 정책적인 배려였다. 진대법은 조선시대 환곡법의 기원이 된다. 백제 전지왕(417) 때에는 오늘날 공공부조사업 가운데 하나인 취로사업이나 공공근로사업을 수행하였다. 춘궁기에는 빈민구제를 목적으로 빈곤백성을 징발해 성을 쌓게 함으로써 토목공사를 통해 구제사업을 실시하였다.

삼국시대 구휼행정은 각종 지해로 인해 영농생산을 할 수 없는 이재민을 구호하고, 재생산에 복귀시킴과 동시에, 농업생산에 참여하기 어려운 무의무탁한 사궁을 보호하였다.

삼국시대 공통적으로 실시되었던 공공부조사업은 첫째, 관곡배급사업이다. 정부에서 비축하고 있는 관곡(官穀)을 각종 재해로 인해 궁핍해진 백성에게 배급해 주는 사업이다. 신라 남해왕, 고구려 태조왕, 태조 온조왕이 실시하였다.

둘째, 사궁규휼(四窮救恤)이다. 사궁(四窮)이란 환과고독(鰥寡孤獨)으로 늙고 아내가 없는 홀아비(), 늙고 남편이 없는 과부(), 어리고 부모가 없는 고아(), 늙고 자녀가 없는 홀로 사는 노인()을 말하며, 자활할 수 없는 이들을 방문 위로하고, 의류곡물 및 관재 등을 제공해 주었다. 사궁에 대한 구휼은 일종의 관부의 의무로 받아 들였다.

셋째, 조세감면이다. 재해로 인해 피해가 심각한 지역의 백성에게 재해의 정도에 따라 조세를 감면해 주었다. 신라 내물과 백제 고이왕이 실시하였다.

넷째, 대곡자모구면(貸穀字母俱免)이다. 이는 춘궁기에 백성에게 대여한 관곡을 국가가 가을에 다시 회수 할 때 재해로 인한 흉작으로 상환이 곤란한 백성에 대해서는 원본과 이자를 감면해 주는 제도이다.

다섯째, 종자 및 식량급여이다. 지난해 흉작으로 농사질 씨앗도 없고 생활도 어려운 백성에게 영농 종자용 곡물과 식량을 대여하거나 무상으로 제공해 주었다.

여섯째, 이재민 방문위로이다. 재해가 발생했을 때 이재민을 방문하고 위로해 주었다.

일곱째, 왕의 책기감선(責己減膳)이다. 재난 발생이 왕이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하고 뜰 아래 방에 기거하고 소식하며 생활을 삼갔다.

 

2) 고려시대

고려시대는 토지의 생산력이 낮고 조세와 오역의 부담이 과중하였으므로 농민을 비롯한 일반 백성의 생활이 대체로 어려웠다. 따라서 국가는 농민을 보호하기 위해 농번기에는 농민을 잡역에 동원하지 못하게 하였고 재해가 심한 경우에는 그 정도에 따라 조세와 부역을 면제해 주도록 하였다.

또 고리대에 의한 농민의 피해를 줄이기 위하여 법으로 이자율을 정하여 이자가 원곡과 같은 액수가 되면 그 이상의 이자는 받을 수 없도록 하였다.

국가는 농업을 진흥하고 농민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해 적극적인 권농정책을 시행하였다.

고려시대 불교가 발전하면서 자비사상(慈悲思想)이 널리 전파되었다. 자비의 자()는 백성에게 낙을 주는 것이고 비()는 백성의 고생을 덜어주는 것이다.

고려시대 백성을 다스리는 근본으로 훈요십조(訓要十條)가 전해지고 있다. 훈요십조는 고려태조가 그의 자손들에게 귀감으로 남긴 10가지의 유훈(遺訓)으로 신서 10(信書 十條) 또는 십훈(十訓)이라고도 한다. 훈료십조 가운데 공공부조와 관련된 내용은 7번째 가운데 민심을 얻으라는 구절이다. 임금이 백성의 신망을 얻는 것이 가장 어려운 것이다. 그 신망을 얻으려면 백성들에게 일을 시키되 적당한 시기를 가리고, 부역을 가볍게 하며, 조세를 감면해 주어야 하고, 백성들이 편안하게 생활하도록 하여야 한다.

 

고려시대의 구빈행정은 진휼(賑恤)제도로서 정인지의 고려사에 소개되고 있다.

첫째 사면지세이다. 이는 개국, 즉위, 순행, 경사, 난후 등의 시기에 조세를 감면해 주는 등의 은전을 베푸는 것이다.

둘째, 제면지제(災免之制)이다. 천재지변이나 질병 등으로 인해 이재민들이 발생했을 때 이들의 조세, 부역 및 형벌을 전부 일부를 감면해 주는 것이다. 성종 때 재면법이 시행되었다.

셋째, 환과고독(鰥寡孤獨)이다. 빈곤해 자활할 수 없는 홀아비, 과부, 고아 및 노인에 양곡이나 주거를 제공하여 보살펴 주는 것이다.

넷째, 수한질여진대지제(水旱疾濾賑貸之制)이다. 지면지제가 이재궁민에게 조세형역등을 면제 또는 감면하는 것임에 반해, 수한질여진대는 각종 물품과 의료, 주택등을 급여하는 사업이다.

다섯째, 납속보관지제(納粟補官之制)이다. 이는 국가재정의 부족을 보충하기 위해 일정한 금품을 납입한 자에게 일정한 고나직을 주는 제도로 구휼과는 무관한 제도였으나 충목왕 때 흉년이나 재해가 발생했을 때 백성을 구휼하기 위한 재원조달 방법으로 사용되었다.

고려시대 공공부조 집행기관은 몇 가지로 나뉜다.

첫째 흑창(黑倉)제도이다. 흑창이란 태조때 빈민을 구제하기 위한 창고이다. 흑창은 성종때 의창으로 바뀌었다. 의창(義倉)은 농민 구제를 위하여 각 지방에 설치한 창고이다. 이 제도는 중국 수()나라에서 유래하여 고구려에서는 고국천왕 16(194)부터 매년 37월 사이에 가구수(家口數)에 따라 관곡(官穀)을 대여하고 10월에 회수하였고, 고려시대에는 태조가 이를 흑창(黑倉)이라 하여 춘궁기에 농민에게 곡식을 대여하고 추수 후에 이를 회수하는 진대법(賑貸法)을 마련하였다. 성종 5(986)에는 흑창의 진대곡을 1만석 더 보충하여 이를 의창이라 하였다. 이것이 최초의 의창이었다. 의창은 여러 지방으로 확산 설치되었다. 그러나 무신집권과 몽골 칩입을 겪는 동안 폐지되었다가 공민왕 때 다시 설치하기로 결정하여 창왕 1(1389) 양광도(楊廣道)에 이를 설치하고 공양왕 3(1391)에는 개경(開經)5()에도 설치하였다.

둘째, ()제도이다. 귀족들에게 부가 집중되면서 고리대업이 행해졌는데, 이는 귀족, 사원 등에 의해 성행하였다. 생활이 빈곤했던 농민들은 고리대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 결과 그들의 생활은 더욱 어렵게 되었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국가가 기금으로 만들어 그 이자로 사업경비를 충당하는 보()가 발달하였다. 빈민구제를 위한 보로는 광종 때 963년에 설치된 제위보가 있었는데 제위포라고도 한다. 제위보에는 국고수입과 기타 고정된기금을 원금으로 거치하고 여기서 나오는 이자로서 구제사업을 실시하였다. 문종 때에는 부사(副使)녹사(錄事) 1명을 두고 운영하였으나 1391(공양왕 3)에 폐지되었다. 이들 보는,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나 이자 취득에만 급급하여 농민들의 생활에 막대한 폐해를 끼치기도 하였다.

셋째, 상평창(常平倉)이다. 상평창은 12(993) 양경 및 12목에 설치되었다. 이때 상평창은 조적(糶糴: 곡식매매)을 통한 물가조절 기능과 가난한 자에 대한 구빈이라는 진휼(賑恤)의 두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충선왕은 상평창의 기능을 전농사(典農司)로 하여금 대신하였는데 이때에는 조적의 기능만 수행하였다. 조선시대의 상평창은 조적을 통한 물가조절 기능만 갖게 되었다.

넷째, 제위도감이다. 제위도감은 곡물, 식염, 소채, 의류 및 면포를 저장하고 빈민구제사업을 실시하였다. 예종 때는 구제도감, 충혜왕 때는 진제도감, 우왕 때는 진제색에서 구빈사업을 실시하였다.

다섯째, 서민의료기관인 혜민국(惠民局)이다. 혜민국은 고려시대 서민의 질병 치료를 위하여 설치한 의료기관으로 의료시약을 목적으로 하였다. 예종 7(1112)에 설치하여 충선왕 때에는 사의서(司儀署)에 예속되었다가, 공양왕 3(1391) 혜민전약국(惠民典藥局)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관원으로는 판관(判官) 4명을 두었으며 본업(本業)과 산직(散職)을 교대로 보내어 일을 담당하게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고려시대를 계승하여 혜민고국(惠民庫局)을 두었고 세조 12(1466) 관제개혁때 혜민서(惠民署)로 이름을 바꾸었다.

여섯째, 동서대비원이다. 동서대비원은 문종 때 설치한 의료기관으로 빈곤한 질병환자를 구호하고 치료하였다. 국립의료기관으로 개경에 동서 대비원과 서경에 대비원을 설치하여 환자를 치료하고, 빈민을 구휼하게 하였다. 충렬왕 때는 80세 이상 된 노인으로서 보호할 사람이 없는 자를 모아 구휼하였고 충선왕 때는 동서대비원의 녹사로 하여금 유비창미(有備倉米)를 지급받아 질병을 치료하도록 하였다.

일곱째, 유비창이다. 유비창은 충선왕 때 설치된 것으로 풍년에 백성들이 자기 능력에 따라 응분의 출곡을 하여 이를 주창고에 저장하였다가 흉년에 이용하도록 하였다.

여덟째, 연호미법이다. 연호미법은 풍년에 호의 대소를 따라 차등 있게 곡실을 내어 비축해 두었다가 유사시 재해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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