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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포트

기독교와 불교의 인생관 비교

by 망고를유혹하네 2024. 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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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 차 -

 

 

[1] 기독교와 불교의 생명관 (p.2~5)

1. 기독교 생명관

2. 불교 생명관

 

[2] 기독교와 불교의 죽음관 (p.6~8)

1. 기독교 죽음관

2. 불교 죽음관

 

[3] 기독교와 불교의 사후세계관 (p.9~10)

1. 기독교 사후세계관

2. 불교 사후세계관

 

[4] 기독교와 불교의 구원관 (p.11~18)

1. 기독교 구원관

2. 불교 구원관

 

[5] 기독교와 불교의 참회관 (p.19~21)

1. 기독교 참회관

2. 불교 참회관

 

- 종 합 정 리 - (p.22)

 

- 참 고 자 료 - (p.23)

 

 

 

 

 

[1] 기독교와 불교의 생명관

 

1. 기독교 생명관

1) 생명 : 하나님의 창조의 소산, 예수 안에 있을 때 생명이 있음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 생명의 근원은 하나님에게서 기원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그분의 형상대로 존귀하게 창조 하셨으나 인간의 죄로 인해 그 생명의 근원 되신 하나님과 단절의 상태에 이르게 되었고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한 전적부패의 상태를 초래하게 되었다. 인간의 본성을 이러한 상태로 규정한 기독교에서는 성악설의 입장을 견지한다.

-인간은 죄로 인해 사망에 이르게 되었으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생명이 있음

 

2) 이 땅에서의 삶

-: 기독교인은 어떻게 살 것인가? 기독교인의 인생을 말하고, 생명을 말 할 때에 그들의 삶의 방향성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의 전인적 타락상태 인간이 행하는 모든 죄악들을 합리화시킬 수는 없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사람은(이 땅의 모든 만물도) 분명한 목적을 갖고 창조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고, 바라보시며 심히좋았다고 말씀하신 표현을 통해서도 인간을 향한 그분의 기대를 느낄 수 있다.

인간은 하나님을 예배해야하며, 그분을 기쁘시게 해야 한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이 땅에서 기독교인은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현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한 실천을 몸소 보여주셨고, 우리는 성경을 통해 그분의 삶이 어떠했는가를 알 수 있다.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며, 우리 안에 성령께서 거하신다는 것을 인식하며, 습관적인 죄의 자리에서 벗어나, 거룩함을 추구해야 한다.

 

 

2. 불교 생명관

불교사상에 따를 때 이 세계는 지수화풍(地水火風)이라는 4대의 요소에 의해 설명될 수도 있고, 5(五蘊)이라는 다섯 요인에 의해 설명될 수도 있다. 우리들이 지각하고 사는 이 세계는 지수화풍의 이합집산 과정이다.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그 근본적 요소는 지수화풍이다. 지수화풍의 이합집산에 의해 우리에게 물질적 형태()로 지각된다. 그런데 물질적 형태를 지닌 것 중에서 의식, 생명을 지닌 것은 색의 요인 외에 수(), (), (), ()의 요인도 더불어 갖고 있다. 색수상행식의 다섯 가지 요인을 오온(五蘊: 다섯 가지의 쌓임, 모임)이라고 하며 모든 생명 현상은 다섯 가지 요인의 쌓임과 흩어짐의 과정일 뿐 그 자체로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라고 불교에서는 말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불교의 입장에서 생물들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근본적으로 실체적 의미의 구별은 없다. 살아 있는 것들(有情)은 서로간의 관계에 의해서 성립하는 존재들이다.

 

원시불교의 근본 사상은 연기이론과 공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나가르주나(Nagarjuna)로 대표되는 중관사상과 아상가(Asanga)와 바수반두(Vasubandhu)에 의해 체계화된 유식사상 시기에 이르러, 이들은 부파불교 시대의 아비달마 불교의 단점을 수정하여 원시불교사상을 재정립한다.

나가르주나는 아비달마 불교의 실유(實有)사상을 비판하고 중도사상(중관사상)을 통해 공()의 개념을 중도(中道)의 의미로 파악한다. 부파불교에서는 법(dharma)의 유()를 주장한다. 여기에서 법은 요소로서의 실재이다. 그러나 현상은 끊임없이 변화하며 무상하다. 따라서 법은 실재이긴 하지만 영원한 실재라고 말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부파불교에 속하는 설일체유부(設一切有部)는 심리작용을 각각 독립의 실체라고 보았다. 설일체유부는 무아를 기계적으로 해석했기 때문에 각기의 심리작용을 독립된 별체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마음이 유기적 통일성을 가지고 활동하는 근거를 밝힐 수 없다. 그리고 법의 유를 강조함으로써 법공(法空)사상에는 이르지 못했다. 이 양자의 문제(법공사상과 마음의 통일성 문제)는 대승불교의 과제가 된다. 요소로서의 법유를 주장하는 설일체유부의 이론을 나가르주나는 구별, 분별의 철학이라고 비판하면서, 이것을 자신의 공의 논리를 가지고 논박한다. 그의 공사상은 중도 및 연기 이론과의 관계에서 전개된다. 그의 중론(Madhyamaka-Sastra)은 바로 이러한 공사상을 담고 있다.

 

나가르주나의 중론의 원리는 팔부중도(八不中道)로 요약할 수 있다. 나가르주나는 중론에서 여덟가지를 부정함으로써 현상의 존재에 대해 논하고 있다. 이 세상의 존재는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不生), 소멸하는 것도 아니고(不滅), 항상적인 것도 아니고(不常), 단절되는 것도 아니고(不斷), 같은 것도 아니고(不一), 다른것도 아니고(不異), 어디선가 오는 것도 아니고(不來), 어디론가 가는 것도 아니다(不去). 생멸의 양 극단을 부정한 이유는(불생, 불멸) 삼라만상의 모든 존재는 인연이 화합하여 나타난 것이며, 멸하는 것도 인연이 다하여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생과 멸은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 이러한 연기의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범부들은 생과 멸이 그 자체로 있는 양 착각하여 집착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가르주나는 이 양 극단을 부정하고 (불일, 불이) 양 극단의 중간인 중도를 취한다. 팔부중도의 이치를 통하여 나가르주나는 우리들이 헛된 것에 집착하여 삶의 진리를 통찰하지 못하는 삶의 방식에 매여 있음을 비판한다. 그는 현상에 대한 공이론을 중도이론을 통하여 해석하고 있다. 현상의 존재는 그 자체의 영원한 실체성을 지니지 않은 공의 존재이되, 이 공은 완전히 무는 아니다. 인간은 영원한 본질을 지닌 실체적 존재가 아니며, 우리들이 소유하고 있는 것이 인간이든, 물질이든, 지식이든, 또는 사회적 지위이든 그것들은 모두 영원한 본질을 지닌 존재가 아니다. 그렇지만 그것들은 아무것도 없는 무는 아니다. 현상적으로는 어떤 방식으로 있는 것이다. 그 있음은 오로지 서로간의 관계(연기)에 의해 있는 것으로서, 유라고 하여도 공을 내포한 유이고, 공이라고 하여도 유를 내포한 공이기 때문에 나가르주나가 생각하기에 이것은 유공(有空)의 중도이다.

 

나가르주나의 중도사상은 원시불교의 공이론 및 연기이론을 치밀한 논리로써 재정립하고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적 삶을 사는 우리들은 좀더 구체적인 삶의 구심점을 필요로 한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가 연기의 존재이자 공의 존재라는 것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다른 한편으로 볼 때, 분명히 나와 남은 구별되지 않는가, 나와 남, 나의 것과 남의 것을 구별하지 않는다면 일상생활이 유지될 수 없다. 이렇게 구별하는 의식은 달리 표현하면 지각이다. 지각의 주체가 있어야 대상이 지각되며, 지각되는 대상은 나에 대한 대립된 존재이지 나와 동일한 존재가 아니다. 어쨌든 사물들을 서로 다른 것으로서 구별하는 즉 지각하는 의식이 현실적으로 일어나며, 이 의식의 담지자가 있어야 한다. 유식학파는 이 담지자를 분석함으로써 식의 주체를 드러낸다. 그렇게 함으로써 중도사상이 자칫 공허한 이론으로 흐를 수 있는 점을 보완한다.

 

유식(唯識)이라는 말은 인간을 비롯하여 이 세계의 모든 존재는 오직 우리의 의식에 의해 만들어지며, 우리의 의식을 떠나서는 어떠한 대상도 존재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불교는 주관적 관념론의 성격을 띤다. 유식사상은 8식사상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유식학파에 따르면 세계는 오로지 우리의 식의 대상으로만 존재한다. 우선, 우리의 일상적인 지각 현상은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의 여섯가지 식으로 전개된다. 내 앞에 지금 열명이 앉아 있다고 지각함은 나의 안근(眼根)의 대상으로서의 식작용(眼識)이 일어난다는 것이고, 지금 내가 피아노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나의 이근(耳根)의 대상으로서의 식작용(耳識)이 일어난다는 것이고, 내가 지금 매우 향기로운 냄새를 맡는다는 것은 나의 비근(鼻根)의 대상으로서의 식작용(鼻識)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다른 모든 신체적 지각 현상도 이와 같이 설명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도 이와 같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지각에는 언제나 제 6식이 더불어 작용한다. 이 제6식의 근거는 의근(意根)이고, 의근의 대상계는 법경(法經)이라고 표현되는데, 법경은 물질적 대상과 정신적 대상이라고 생각하는 존재들을 모두 포함한다. 6식의 뿌리인 의근은 동시에 제7식이며 마나스식(manas-vijnana)이라고도 불린다. 마나스식은 우리들이 흔히 라고 생각하는 주체를 가리킨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들은 를 중심으로 하여 삶을 영위해 나간다. ‘라고 하는 이러한 마나스식은 현실의 의식을 지탱해주는 근거이자 그 의식들이 쌓여 업력(業力)을 형성하여 윤회의 근거가 된다. 그런데 제7식인 마나스식의 뿌리는 제8식의 아뢰야식(阿賴耶識)으로서 그러한 의미에서 근본식이라고도 불린다. 아뢰야식(阿賴耶識)은 우리의 모든 의식의 근본적 담지자이기 때문에 종자식(種子識)이라고도 불리고, 장식(藏識)이라고도 한다. 불교사상에 따를 때 나라고 하는 주체는 제8식인 아뢰야식에 저장된 종자들이 현실 생활에서 적용하는 힘으로서 나타난 것이고, 또 현실의 삶에서 우리들이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새로운 종자들이 다시 알라야식에 저장되고, 또 이 저장된 종자들이 현실에서 작용하는 이러한 무한한 과정이 전개되는 자리일 뿐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볼 때 유식사상에서는 단지, 인간을 포함한 이 세상의 존재에 대해 설명하고자 하는 존재론 및 인식론이 근본적 관심이 아니라, 더 나아가 우리들이 이 번뇌의 세계에서 어떻게 초극하느냐 하는 것에 더 커다란 관심을 갖고 있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서 볼 때, 불교의 입장에서는 신체적 생명을 지닌 이 삶이 최고의 삶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생명을 지닌 유정들은 현생에서 업력을 청정하게 만들기 위해 정진해야 하며, 궁극에는 유정의 삶에서 해탈하는 것을 최상의 길로 본다.

 

 

 

[2] 기독교와 불교의 죽음관

 

1. 기독교 죽음관

1)육체적 죽음

(1)죽음

-기독교에서는 죽음을 단순한 생물학적 과정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이는 원창조의 질서 안에서 십자가의 구속사역을 통해 극복되어져야하는 것이다.

 

(2)‘육체의 죽음앞에서의 기독교인

-죽음 뒤에 있는 하나님 나라의 실재를 확신하고, 죽음을 두려워하기 보다는 이 땅에서의 삶에 충실해야한다.

 

2)영적 죽음

-기독교에서 말하는 영적 죽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죄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란 무엇이며 이와 연관해서 죽음이란 무엇인지 살펴보기로 하자.

 

(1)

-: 죄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에 반대되는 것이며, 그의 뜻에 대한 실제적 반대이다.

-원죄와 자범죄 :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에는 원죄와 자범죄가 있다.

원죄는 아담으로부터 유전되어진 것으로 아담의 첫 범죄와 원시적 의의 결핍, 그리고 사람의 전 성질의 부패로 구성되어 진다.

자범죄는 원죄의 결과로 인한 모든 내면적 의식적인 악한 생각들과 육체를 방편으로 한 모든 외면적인 악한 행동들을 일컫는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신 인간은 태초에 본래적으로 선하게 창조되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선을 잃은(본질상 하나님의 형상을 잃은) 인간은 도덕적 국면인 참지식, , 거룩을 포함한 도덕적 성질 전체와 지능적 국면인 지식, 감정, 의지의 각 부분들과 기능들이 전적으로 부패되었고, 그의 본성에는 영적으로 선한 것이 하나도 없는 상태가 되었다.

 

(2)죽음

-죽음 : 죄로 인한 비정상적인 상태

(정상적인 상태 : 하나님과의 연합)

-기독교에서 말하는 또 다른 의미의 죽음은 인간의 전적부패에서 오는 하나님과의 단절의 상태를 말한다. 이러한 죽음은 하나님의 심판과 연관하여 이해되고 있는데,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죽음 그자체가 아닌 죽음에서 대면하게 될 하나님의 심판인 것이다.

 

2. 불교 죽음관

인류 역사상 보편적 죽음관념인 영혼불멸론과 단멸론은 불교의 삼법인설(三法印說)과 삼세윤회설(三世輪回說)에서도 부정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현세의 응보()는 전생에서 지은 업()의 결과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전세(前世)인 숙세의 존재를 상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겠는데, 결국 이러한 교설은 업보의 전개 범위를 숙세현세와 함께 내세를 상정하고 있기에 불교에서는 단멸론적 입장을 부정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불교에서는 생유(生有), 본유(本有), 사유(死有), 중유(中有)와 같은 사유(四有) 가운데서 새로운 탄생을 준비하는 중유를 상정하고 있는데서도 단멸론의 입장을 인정하지 않는다 할 것이다.

 

단멸론적인 견해를 부정하는 불교는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열반적정(涅槃寂靜)과 같은 세가지 진리(三法印)의 교설을 통하여 영혼불멸론의 입장도 아님을 밝히고 있는데 사후에 영속하는 불멸의 마음(영혼)은 일체의 육체적 작용을 통어하고 모든 인식작용을 종합하는 하나의 주체로서 파악하며, 그 주체를 나()라고 보기 때문이다.

 

불교에서는 그러한 주체를 열두 포섭 처 중 의지()에다 두고 있다. 그 의지는 눈, , , , 몸과 함께 덧없고 괴로우며 무아(無我)라고 단정하고 영속성이 없으며(無常) 또한 주체성(主帝性)도 결여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불멸의 마음(영혼)이 존재한다는 견해는 잘못된 견해이며, 삼법인(三法印)의 교설은 영혼불멸론의 견해도 부정하는 결과를 낳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불교는 죽음은 곧 삶이고 열반이라는 인식적 기반도 그 기조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므로 불교에 있어서 죽음에 대한 독특한 인식방식은 생사윤회(生死輪廻)와 생사즉반열(生死卽涅槃)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불교에서의 죽음의 의미는 체온과 의식이 육체로부터 사라질 때 수명이 파괴되며, 이때를 죽음이라 칭하는 셈이 된다.

 

불교의 관점에서 보는 인간 존재는 4(지수화풍) 5(색수상행식)의 모임에 불과하다. 신체의 물질적 성분은 지수화풍이고, 우리의 신체와 정신이라는 것은 지수화풍의 색()과 수상행식(受想行識)이라는 다섯 가지의 요소가 모인 것이다. 이 다섯 가지가 요소가 모여서 우리의 생명이 형성되고 흩어질 때 생명이 다하는 것이다. 이렇게 여러 가지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는 인간 존재는 정해진 기간 동안 이 땅에서 살다가 인연이 다하면 죽게 된다. 불교에 따르면 죽는다는 것은 영원히 이 세상을 떠나 다른 세상으로 가버리거나, 아니면 완전히 무로 사라져 버린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세상에서 죽으면 새로운 몸을 받아 이 세상의 다른 곳에 태어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은 한없이 되풀이된다. 이것이 바로 윤회이다.

 

인간이 죽으면 의도적 행위들에 의한 업력이 남게 되고(윤회의 근거), 우리의 생명을 이루고 있던 여러 가지 요소들은 모두 흩어져 버린다. 우리들이 흔히 영원불멸의 영혼이라고 일컫는 것을 불교는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신체는 죽더라도 영혼만은 불멸의 생을 지속한다고 할 수 없다. 우리의 생명이 다하면 신체도 정신도 사라지는 것이다. 이는 마치 마가바드기타에서도 말하고 있듯이, ‘헌옷을 벗어버리고 새 옷으로 갈아입는 것과 같다. 초기의 불교경전들(잡아함경, 증일아함경, 중아함경 등)에서는 죽음에 대해 특히 세가지 특징을 묘사하고 있다. 죽음은 수명이 다하고, 체온이 떠난 상태이며, 의식()이 끊어진 상태이다. 이 세 요소가 육체에서 떠날 때 우리는 죽었다고 말한다. 이 세 요소가 떠난 육체는 묘지에 버려진 나무토막처럼 의식 없는 물질(無情)로 되어 버린다.

 

수명을 초기 불교에서는 호흡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많았다. 이는 우파니샤드(찬도갸우파니샤드, 브리히다라냐카우파니샤드) 등의 고대 힌두이즘의 영향을 보여준다. 그러나 우파니샤드에서의 호흡은 실체적 영혼의 생명원리로서의 호흡을 말한다면, 불교에서는 생존시의 들숨, 날숨으로서의 현상을 호흡으로서 이해한다. 체온이 떠났다는 것은 말 그대로이고, 의식이 떠났다는 것은 오온에서 다섯 번째의 식이 신체에서 떠났다는 뜻이다. 수명(호흡), 체온, 의식이 떠난 신체는 이제 무생물의 물체와 같은 것이 되어 버리기 때문에, 불교에 따르면 그것을 불태워버리거나(화장) 들판의 짐승들의 먹이로 주거나 해도 문제가 없다.

 

 

 

 

[3] 기독교와 불교의 사후세계관

 

1. 기독교 사후세계관

-천국에 대한 기독교의 입장은 기독교 역사 속에서 현재까지도 끊임없이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다. 예컨대, 현재적 종말론과 미래적 종말론 등이 그것이다.

현재적 종말론은 현재 이루어지는 내적 통치를 일컫고, 미래적 종말론은 미래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외적인 통치를 뜻하는데, 여기서는 미래적 종말론의 입장에서 사후세계를 이야기하려 한다.

 

1)사후세계

-사후세계 :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할 것이라고 보고 있다.

 

2)부활

-고전 15 : 20 에서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 표현함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이 단순한 그리스도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라고 말할 정도로 기독교에 있어서는 중요한 교리의 하나이다. 각 복음서들의 마지막장에는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 몸의 십자가의 흔적이나 음식을 드시던 것을 통해, 부활을 단순한 시체의 부활로 보아서는 안 된다, 부활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행하신 일들을 통해 우리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시는 창조적인 부활의 형체로 이해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2. 불교 사후세계관

불교의 존재관에서는 어떤 것도 영원할 수가 없다. 생이라 해도 영원한 삶이 아니며 사()라 하더라도 그 또한 영원한 삶이 아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전부터 인도의 여러 종교나 사상에 전래되어 오던 윤회전생설을 불교가 수용하였다. 불교의 윤회전생설은 네 전생을 알려거든 현재의 삶을 보아라. 그리고 내생을 알고자 하거든 현재 네가 하고 있는 행동을 보아라. 만일 고의로 업을 지음이 있으면 반드시 그 보()를 받나니 혹은 현세에 받고 혹은 내세에 받는다.” 라는 내용처럼 자기 자신이 지은 행동, 즉 업의 인과에 따라 다음의 삶과 사후세계의 방향이 결정된다는 업인과보(業因果報) 사상을 근거로 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사성제와 팔정도의 수행을 통하여 생사의 고통을 극복하지 못하고, 욕망 속에서 산다면 중생은 자신의 몸과 입 및 생각(마음)으로 지은 업()의 질과 양에 따라 여섯 갈래(六道)의 세계에서 생,사를 거듭하는 윤회전생을 반복하게 된다. 불교에 있어서 여섯 갈래의 세계는 천상(天上), 인간(人間), 아수라(阿修羅), 아귀(餓鬼), 축생(畜生), 지옥(地獄)으로 분류하고 있다. 이 중 천상, 인간, 아수라는 삼선도(三善道)이고 아귀, 축생, 지옥은 삼악도(三惡道)라 일컫는다. 그러나 삼악도는 물론이고 삼선도조차 결코 영원한 세계는 아니다.

 

삼선도(三善道)?

아수라는 싸움을 좋아하여 항상 싸움이 끊이지 않는 사후공간으로 교만하고 성내기를 즐기는 사람들이 가게 된다. 삼악도보다 지혜는 있으나 나()라는 자의식이 강하기에 고통이 심한 세계이다. 고통과 즐거움이 공존하는 인간계는 크게 고통을 받을 만한 악행이나 행복만을 약속 받을 만한 뛰어난 선행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 경우에 태어나게 된다. 다른 세계에서는 중생 자신이 지은 복과 죄에 따른 보상과 벌이 있을 뿐인데 비해, 고통과 즐거움이 공존하는 인간계는 자신의 의지에 따라 고통과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세계이다. 따라서 천상에 나거나 지옥에 다시 태어나게 하는 선업과 악업을 짓는 세계는 오직 인간계에서만 가능하고, 수행을 통해서 성불을 하는 공간도 인간계에서만 가능하다. 인간계보다 한 단계 위인 천계는 괴로움은 적고 평화롭고 즐거움으로 가득한 세계이다. 하고 싶은 일을 생각만 하면 해결된다는 천계는 열 가지 착한 업(十善業)을 지으면 태어날 수 있다.

 

삼악도(三惡道)?

지옥은 그 근거지가 대개 지하로 상정되며 온갖 고통이 심한 세계이다. 여기에는 몸과 입과 생각으로 짓는 열 가지 나쁜 업(十惡業)을 상품(上品)으로 저지른 결과로 인하여 이르게 되는 사후 공간이며 지장보살이 주재하고 있다. 배고픔의 세계인 아귀는 지나치게 음식을 탐하고 남에게 인색하며, 열 가지의 나쁜 업을 중품(中品)으로 지은 사람이 가는 사후 세계이다.

소나 말, 돼지 등 동물의 세계인 축생의 세계는 감정에만 치우쳐 아주 어리석은 짓을 많이 하고, 열 가지의 나쁜 업을 하품(下品)으로 저지른 사람이 가서 태어나는 사후 공간이다.

 

고대 브라만교의 사후에 대한 관념은 초기 불교학파인 설일절유부파(說一切有部派)에 의해 교리적 체계가 확립되었다. 여기에 따르면 생존하는 일체의 것은 욕망인 탐애(貪愛), 집착(執着)을 연()으로 하여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 유전(流轉)한다고 한다. 중생(有生)이 윤회하는 세계에 오취(五趣)인 지옥, 아귀, 축생, , 천을 세우고, 중생은 스스로 지은 업보(業報)로써 이 오취를 유전하는 동안 태어나면서 재생할 때까지 사유(四有)인 중유(中有), 생유(生有), 본유(本有), 사유(死有)라는 사유(四有)의 생존 과정을 경유한다고 한다. 이 중 사후의 세계에 해당하는 것이 중유(中有)이다. 사람이 죽으면 극선인(極善人)과 극악인(極惡人)을 제외한 대부분의 범인(凡人)들은 중유에서 다음에 태어날 생()을 기다린다고 한다. 중유 기간은 부파(部派)나 논서(論書)에 따라 다소 차이를 보이고 있으나 사후 짧게는 7, 길게는 49일이 지나면 새로운 삶을 얻어 전생한다는 것이다.

 

사유(四有)?

생유(生有) : 태어나는 순간 또는 찰나

본유(本有) : 이로부터 죽기 직전까지의 중간

사유(死有) : 최후의 죽는 순간

중유(中有) : 임종 직후부터 재생할 때까지의 상태

 

 

 

 

[4] 기독교와 불교의 구원관

 

1.기독교 구원관

-원죄 아래 있는 인간은 필연적으로 죄를 짓게 된다.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불행한 상황 속에서 벗어나기 위한 가능성을 인간 자체에서는 찾을 수 없으며,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인간들은 하나님의 은총을 통해서만 구원 받을 수 있다. 그 은총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실현되는 것이다.

 

1)죄와 사망의 법, 그리고 대속

-원죄 아래 인간은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는 전적부패의 상태가 되었으며, 죄와 사망의 법 아래 인간은 영적인 죽음의 상태에 이르게 된다.

인간은 이러한 사망의 상태인 것을 깨달을 능력 또한 상실한 상태이며,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시더라도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죄와 사망의 자리에서 나올 수는 없다.

레위기 17:11의 말씀을 통해 피를 통한 죄 사함을 규정하고 있으나 레위기 1장의 말씀에서 끊임없이 강조하듯이 하나님께 드려질 예물은 흠이 없어야 하는데 죄짓지 않은 인간은 전혀 없다.

-기독교에서는 이러한 죄와 사망의 법에 대한 해결자로서 예수그리스도를 말하고 있다.

 

2)예수그리스도의 대속사역

-인간의 죄에 대한 문제의 해결인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사역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위에서 말했듯이 인간은 전인적 타락의 상태에 놓여있어 스스로 죄의 문제를 해결 할 수 없고, 이를 위해 예수께서 친히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으나 죄는 없으셨던 예수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죄에 대한 해결의 길이 열렸다.

 

3)구원사역에 있어서 하나님과 인간의 행동관계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의 관점에서 바라본 구원사역에 있어서 하나님과 인간과의 행동관계를 살펴보려한다. 웨슬리는 신단동설이나 신인협동설을 부인한다. 그의 주장을 한단어로 표현하자면 복음적 신인협동설(혹은, 소박한 신인협동설)’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이러한 표현도 올바른 표현이라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웨슬리의 주장은 무엇인가? 요약하면, ‘하나님의 설득-설득된 인간의 순종-하나님의 이루심이다.

이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보도록 하자.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구원하실 때, 강압적으로(불가항력적 은혜) 하시는 것이 아니라,

선행의 은혜로 양심의 가책을 느껴 죄를 깨닫도록 설득하시고,

회개의 은혜를 통하여 원죄를 깨달아 회개하도록 설득하시고,

칭의의 은혜에서도 믿음이라는 것이 강압적인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들에 대한 하나님이 깨닫게 하시는 자명성(하나님의 설득)과 이에 의하여 직관적으로 설득된 확신이라는 의미의 믿음을 통하여 칭의 하시며 거듭나게 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성화의 은혜에서도 믿는 자의 죄를 깨닫게 하시어 회개하도록 설득하시고,

믿음의 상태가 되도록 설득하시므로, 의와 거룩을 향하도록 설득되어 순종하며 성화를 이루어 나가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인간의 순종을 하나님과의 협동으로 말 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인간은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 설득된 자로서 그리고 이 설득된 내용에 일치되게자진해서 선택하고 결정하여 순종한 것 밖에 없는 것이다.

구원은 오로지 하나님께서 혼자서 은혜로써 하시는 일이며, 인간은 구원의 역사의 매단계마다 하나님의 설득에 의하여, 설득되어진 인간이 순종하며 나아갈 때 이루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일이시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의 본질은 인간본연의 능력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 타자이신 절대자의 능력(타력)에 의지하게 된다.

 

4)믿음과 행위

-기독교의 구원에 있어서 또 하나의 쟁점은 바로 믿음과 행함의 관계일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된다. 그렇다면 행위는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이 오류를 범하는 것이 행함이 없는 믿음을 죽은 것이라고 했던 야고보서의 기록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출발한다. 야고보서에서 말하듯이 행함이 믿음을 증거 하는 것은 사실이나 행함이 구원의 주체가 될 수는 없다. 행함은 믿음이 선행되어 그 증거로써 당연히 나타나야 하는 것이지만 행함이 있다고 해서 믿음이 있다고 하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다. 믿음과 행함을 일체화 시키게 될 경우 우리는 인간의 행함(선행) 자체를 부곽 시켜 구원을 인간의 행위의 공로로 보는 오류를 범하게 될 것이다.

 

 

2. 불교 구원관

석가모니의 핵심 가르침은 사성제(四聖諦)팔정도(八正道)로 요약할 수 있다.

(),(),()을 극복하고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정정(正定)를 통하여 해탈에 이르는 것이 초기불교의 구원관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사성제(四聖諦)?

십이연기설은 인간에게 왜 생사의 괴로움(苦蘊)이 발생()하며, 또 멸할 수 있는가를 밝혀 주는 가장 체계적이고 완비된 이론이라는 것은 앞 장에서 논한 바와 같다. 이러한 고온의 집과 멸에 입각해서 베풀어진 본격적인 실천적 교설을 학계에서는 사성제 또는 사제(四諦)의 교설이라고 보고 있다. (satya)라는 말은 ''로 읽는데, 사실(fact),진실,진리(truth) 등을 나타낸다. 그러한 제로서 고(),(),(),()의 네 가지를 설하여 이것을 신성한 종교적 진리로 삼고 있는 데에서 사성제(catur-arya-satya)라고 부르는 것이다. "네 가지 성제가 있으니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괴로움(), 괴로움의 집(苦集), 괴로움의 멸(苦滅), 괴로움의 멸에 이르는 도(苦滅道)의 네 가지 성제(四聖諦)가 곧 그것이다."<잡아함 권 15> "뭇 교설은 사성제로 집약된다."<중아함 권 7. 象跡喩經>고 말해질 정도로 중요시되는 이 사제는 이제 어떤 내용을 가진 것인가 살펴보자.

 

첫째, 괴로움의 성제에 대해서 경전은 여덟 가지 괴로움(八苦)을 드는 것이 보통이다. "어떤 것이 고성제(苦聖諦)인가. 생하고() 늙고() 병들고() 죽고() 미운 것과 만나고(怨憎會)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고(愛別離) 구하는 바를 얻지 못하는(求不得) 것은 괴로움이다. 한 마디롤 말하면 오취온(五取蘊)은 괴로움이다."<중아함 권 7 分別聖諦經>

이 여덟 가지 괴로움은 삼법인설에서 충분히 밝혔던 것이므로 여기서 재론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십이연기설에서도 인간의 현실적 존재는 괴로움으로 제시하고 있다. 무명에서 시작한 연기는 생,,사에 귀결되고 있으며, 그것을 '커다란 하나의 고온(純大苦蘊)'이라고 다시 요약하고 있음을 보기 때문이다. 괴로움의 성제는 바로 이 명백한 사실을 바로 가리키고 있다.

 

둘째, 괴로움의 집()이라는 성제는 위에서 말한 괴로움이 어떻게 해서 발생하게 되었는가의 이유를 밝혀 주고 있다. 경전에는 여러 가지 설명이 베풀어져 있는데 주로 오온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즉 오온에 대한 '애탐(愛貪, chanda-raga)'<잡아함 권 2>이라든가 또는 "재생(再生)을 초래하고(punar-bhavika) 희탐(喜貪, nandi-raga)을 수반하고 이곳 저곳에 낙착(樂着, abhinandin)하는 애(, trsna)"<잡아함 권 3>라고 설명되어 있기도 하다. 어떤 경우에는 오온 중의 색은 애희(愛喜)가 그 집()이고, ,,행은 촉이, 식은 명색(名色)이 그 집()이라고 따로따로 설해져 있는 경우도 있다.<잡아함 권 2> 괴로움의 집을 이렇게 오온을 대상으로 설명하고 있음은 앞서 고성제에서 여덟가지 괴로움을 오취온으로 요약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집이라는 개념의 최승(最勝)한 뜻은 역시 십이연기설에서 찾아야 한다. (, samudaya)이라는 술어는 원래는 '결합하여(sam-) 상승하다(udaya)'는 뜻으로서 '모으다(collect)'는 뜻이 아니다. '집기(集起)'라고 번역함이 좋은 말이다. 따라서 연기라는 말과 매우 가까운 개념이다. 그러기에 십이연기설에서도 생사의 괴로움이 무명에서 연기한 것임을 설한 다음 "그렇게 해서 오온의 집이 있다."고 맺고 있는 것이다. 집이 이렇게 연기에 통하는 개념이라면, 괴로움의 집이라는 두 번째 성제는 괴로움은 연기한 것이라는 명백한 사실을 가리킨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또 그것은 괴로움의 성제와 함께 십이연기설의 유전문(流轉門)에 입각한 사실을 지적한 것이라고 보아도 좋다.

 

셋째, 괴로움의 멸이라는 성제는 집제와 정확하게 반대되는 입장이다. 경전에도 그런 각도에서 설명되고 있다. 오온의 집이 애탐(愛貪) 등으로 설명되면, 멸제는 그것을 멸한 것이라고 설명되어 있는 것이다. 십이연기설에서도 생사의 멸은 무명의 멸과 함께 사라진다고 설한 다음 "그렇게 하나의 커다란 고온(苦蘊)의 멸()이 있다."고 맺어져 있다. '(, nirodha)'의 원어 또한 '멸하다'는 뜻을 나타내고 있다. 생사의 괴로움이 무명에서 연기한 것이 분명하다면, 무명의 멸진(滅盡)을 통해 우리는 그 괴로움을 근본적으로 극복할 수가 있을 것이다. 괴로움의 멸이라는 성제는 우리에게 이 명백한 사실을 깨우쳐 주고, 동시에 괴로움이 사라진 그러한 종교적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고 말할 수가 있다.

넷째, 괴로움의 멸에 이르는 길()이라는 성제는 경전에 팔정도라고 설명되어 있다. 정견(正見),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의 여덟가지 실천 사항을 가리킨다.

 

팔정도(八正道)?

이것은 원시불교의 경전인 아함경(阿含經)의 법으로, 석가의 근본 교설에 해당하는 불교에서는 중요한 교리이다. 고통을 소멸하는 참된 진리인 8가지 덕목은 정견(正見):올바로 보는 것. 정사(正思:正思惟):올바로 생각하는 것. 정어(正語):올바로 말하는 것. 정업(正業):올바로 행동하는 것. 정명(正命):올바로 목숨을 유지하는 것. 정근(正勤:正精進):올바로 부지런히 노력하는 것. 정념(正念):올바로 기억하고 생각하는 것. 정정(正定):올바로 마음을 안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초기불교인들이 바라보는 구원관인 열반이나 해탈이란 의미는 무엇인가?

열반이란?

"사리푸타(舍利弗), '열반, 열반' 하고 말하지만, 대체 열반이란 무엇인가?"

"벗이여, 무릇 탐욕의 소멸, 노여움의 소멸, 어리석음의 소멸, 이것을 일컬어 열반이라 한다."

"그렇다면 벗이여, 그 열반을 실현할 방법이 있는가? 거기로 갈 길이 있는가?"

"벗이여, 이 성스러운 팔정도야말로 그 열반을 실현하는 방법이다. 그것은 즉 정견,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이다."

([相應部經典(상응부경전)] 38:1 浬槃(열반))

 

붓다가 열반을 말씀할 때, 결국은 이런 예속 없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공적 무위(空寂無爲)의 소극적인 경지라고 할 수 없다. 거기서 불이 꺼지듯이 소멸되어야 하는 것은 갈애이다. 그리고 번뇌의 불꽃이며, 탐욕과 노여움과 어리석음일 뿐이다. 인간 자체가 여기에서 "소멸하여" 어딘가에 가서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여전히 여기 이 땅에 있는 것이다. 그를 예속하던 갈애가 소멸됨으로써, 그는 완전한 자유와 안온 속에서 여전히 살아가는 것이다. 진리의 길, 평화의 길을. 그리고 그것이 열반이다.

 

해탈이란?

인간의 근본적 아집(我執)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인도사상(印度思想불교는 이것을 종교와 인생의 궁극 목적으로 생각하였다. 즉 범부는 탐욕·분노·어리석음 등의 번뇌 또는 과거의 업()에 속박되어 있으며, 이로부터의 해방이 곧 구원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구원은 타율적으로 신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지혜, 즉 반야(般若)를 증득(證得)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하는 데 특징이 있다. 결국 번뇌의 속박을 떠나 삼계(三界:欲界·色界·無色界)를 탈각(脫却)하여 무애자재(無礙自在)의 깨달음을 얻는 것을 가리킨다.

또한 초기불교인들의 구원관은 다른 어떤 것을 의지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닌 구원의 주체가 100% 자신이며 끊임없는 정진과 그로인한 깨닭음으로써 완성되는 것임을 볼 수 있다.

 

<6년 고행의 모습 중에서>

수행중인 보살이 많은 수행자를 찾아다닌 일은 경전에도 나와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특히 지도를 받아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되는 스승이 두 사람 있었다. 바이샤일리에 있던 아라다 카라마와 마가다국에 있던 우드라카 라마푸트라였다. 보살은 먼저 아라다를 만나 이렇게 말했다.

친구 카라마여 나는 이 법과 율에서 법행을 닦고자 합니다.”

법과 율이란 교리와 실천을 의미하는데 그 당시 표현으로서 현재의 종교라는 말에 해당된다. 범행이란 청정한 수행이라는 뜻으로 바른 종교가의 수행을 말한다.

보살의 이 말에 대해 아라다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여기 머물러 있어도 좋소 현명한 사람이 이 법에 따라 수행하면 머지않아 스스로 깨닫게 될 것이오

보살은 얼마 안 있어 그의 법을 깨달을 수 있었기 때문에 아라다에게 가서 깨달음을 말했다.

 

보살이 라아자그리하에 머무르는 동안 한 사람의 선인(仙人)을 찾아갔다. 우드라카 라마푸트라라고 하는데 그는 7백 명의 제자를 거느리어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었다. 보살은 우드라카에게 가서

당신은 누구를 스승으로 하셨습니까?” 라고 물었다. 우드라카는 나는 본래 스승을 모시지 않고 저절로 깨달았소하고 대답했다. 보살은 이 살마의 가르침을 듣고 또 홀로 들어박혀 수행에 힘썼다. 얼마 안 가서 그가 가르쳐준 대로 정진한 끝에 효과를 얻었다.... 우드라카도 이전의 아라다와 마찬가지로 보살과 둘이서 같이 교단을 지도하자고 제안해 왔다. 그러나 보살은 이것으로써도 아직 자신이 출가한 본래 목적이 달성되지 않았음을 알고 이를 사양하고 다시 다른 방법을 찾게 된다. 아라다 카라마와 우드라카 라마푸트라 이 두사람은 보살이 수행 중에 만난 가장 뛰어난 지도자였다.

 

<깨닭음을 얻은 후에>

부처님이 처음 보리수 아래서 성도(成道)를 하고 바라나시로 가던 도중 우파카라고 하는 아지바카교의 수행자와 만났다. 우파카는 부처님의 거룩한 모습에 놀라

당신의 스승은 누구입니까?” 하고 물으니 나는 스승이 없이 홀로 부처가 되었소하고 부처님은 대답했다. 그러자 흐흥, 그럴 수도 있겠지요하고 지나가 버렸다. 이 우파카는 부처님 최초의 제자가 될 수 있었던 기회를 스스로 버리고 만 것이다.

 

<입멸전 최후의 말씀>

부처님은 비구들을 둘레에 모이게 한 다음 말씀했다.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부처이건 법이건 교단이건 도()이건 수행 방법이건 의문이 있는 사람은 서슴치 말고 물어라 뒷날에 가서 여래가 세상에 있을 때 물어보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하고 후회하지 않도록 지금 물어라부처님은 몇 번이고 말씀했지만 누구 하나 질문하는 이가 없이 거기 있는 5백 명의 비구들은 적어도 흔들리지 않는 확신에까지 이르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때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였다.

그럼 비구들이여 너희들에게 할말은 이렇다. 모든 현상은 변천한다. 게으름이 없이 정진하여라

실로 이것이 여래의 마지막 말씀이었다고 경전은 기록하고 있다.

 

석가모니의 고백에서처럼 끊임없는 정진에 의한 스스로의 깨닭음으로 해탈을 추구하는 것이 초기불교인들이 추구하는 구원의 핵심내용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석가모니는 유파니샤드에서 설하는 윤회와 업 사상을 인도의 고유한 전통사상으로 받아들이면서 불교세계 속에 도입하였다. 다만 브라만교와 다른 것은 그 윤회로부터 어떻게 벗어나 해탈에 이르는가 하는 방법의 차이뿐이었다. 그 방법의 차이는 불교의 무아설이 브라만교의 아트만론과 다르다는 것에서 시작된다.

 

이런 불교의 구원관도 후대로 내려오면서 점차 다른 양상을 보이게 되는데 석가모니의 입멸 이후에 불교교단은 그들을 하나로 통일시킬 만한 지도자나 통일원리를 발견하지 못하였고 제2차 결집을 계기로 두 개의 커다란 부파(部派), 즉 붓다의 가르침을 충실히 지키는 것을 표방하는 보수파 장로들 중심의 상좌부(上座部)와 교리와 승단의 규율에 있어서 보다 신축성을 허용하는 진보적인 대중부(大衆部)로 분열되었다. 오늘날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 라오스 그리고 캄보디아 등지에서 널리 신봉되고 있는 상좌부불교는 흔히 후기에 대승불교라고 불리는 불교집단에 의해서 소승(小乘)불교라고 폄칭된 것들 중에서 현존 유일의, 그리고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부파이다. 상좌부와 대중부의 분열은 아라한의 상태에 대한 질문에서 일어났는데 상좌부에서 본 아라한은 모든 면에서 완전한 성자였지만 대중부에서 보면 아라한들은 아직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존재들이었다. 상좌부에서는 석가모니 붓다가 붓다로 되기 이전의 상태를 보살(菩薩)이라고 하면서, 보살은 오직 싯다르타 하나뿐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대중부는 보살로 나아가는 데에는 10개의 단계를 거쳐야 하며, 이를 모두 통과한 이는 누구라도 보살이 될 수 있다고 선언하였다. 또한 붓다를 바라보는 관점도 전통적인 상좌부의 입장에서는 붓다도 하나의 인간에 불과했으며 단지 그가 여타의 인간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오직 그가 대각을 이루었다는 사실뿐이었다고 생각한 반면 대중부의 입장은 붓다가 하나의 인간이기보다 오히려 진리(dharma)로서, 즉 법신(法身)으로서 불리게 된다. 한마디로 소승불교로 불리는 상좌부는 불교의 전통을 충실하게 고수하고 있던 반면, 대중부는 새로운 붓다관을 전개하고 보살사상을 발전시켰으며 모든 중생이 성불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하게 된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어떤 불교관이 전래되어 왔는가?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 라오스, 캄보디아 등의 동남아시아에서 신봉되고 있는 상좌부불교권이라면 우리나라가 속해있는 중국, 일본, 베트남, 티베트 등은 대승불교권이다. 우리나라는 삼국 고구려 시대에 불교가 처음 전래 되었는데 그 뿌리는 대중부의 사상에 뿌리를 둔 대승불교였다. 그러다보니 우리나라 불교인들의 구원관도 자연히 석가모니가 말했던 구원관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의 형태로 정착되게 되었다.

 

소승불교와 대승불교의 구원관 요약

소승불교의 구원관을 간단히 말하자면 석가모니의 가르침에 충실하여 개인의 열반을 위한 불교라면 대승불교의 구원관은 자기만의 구제보다는 이타(利他)를 지향하는 보살의 역할을 그 이상(理想)으로 삼는 구원관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 불교인들의 구원관을 이해하려면 보살이란 개념을 알아야만 그들의 구원관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보살이란?

보디(bodhi)budh(깨닫다)에서 파생된 말로 깨달음 ·지혜 ·불지(佛智)라는 의미를 지니며, 사트바(sattva)as(존재하다)가 어원으로 생명 있는 존재, 즉 중생(衆生) ·유정(有情)을 뜻한다. 보살의 일반적인 정의(定義)보리를 구하고 있는 유정으로서 보리를 증득(證得)할 것이 확정된 유정’ ‘구도자(求道者)’ 또는 지혜를 가진 사람’ ‘지혜를 본질로 하는 사람등으로 풀이할 수 있다. 보살이 모든 사람을 뜻하게 된 것은 대승불교(大乘佛敎)가 확립된 뒤부터이지만, 그 용어와 개념의 시초는 BC 2세기경에 성립된 본생담(本生譚:석가의 前生에 관한 이야기)에서였다. 본생담은 크게 깨달음을 얻은 석가를 신성시하고, 그 깨달음의 근원을 전생에서 이룩한 갖가지 수행에서 찾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살은 구도자로서의 석가를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특히 연등불수기(燃燈佛授記:석존이 연등불로부터 불타가 될 것이라는 예언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계기로 하여 석가를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 즉 보살이라 일컫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같이 단수로서 석가만을 가리키던 보살이 복수로서 중생을 뜻하게 된 것은 본생담의 석가가 출가(出家) 비구(比丘)에 국한되지 않고 왕 ·대신 ·직업인 ·금수(禽獸)이기도 하였으며, 나아가 과거 ·현재 ·미래세계에 다수의 부처가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석가보살과 같은 특정의 보살만이 아니라, 누구든지 성불(成佛)의 서원(誓願)을 일으켜 보살의 길로 나아가면 그 사람이 바로 보살이며, 장차 성불(成佛)할 것이라는 이른바 범부(凡夫)의 보살사상이 생겨났다.

 

이러한 보살사상은 공() 사상과 결합하여 하나의 절대적 경지에 이르렀으며, 육바라밀(六波羅蜜) ·사무량심(四無量心:···) ·무생법인(無生法忍) 등의 실천을 근간(根幹)으로 대승불교의 기본적인 축()이 되었다. 대승불교의 보살사상 중 기본적인 두 개념은 서원(誓願)과 회향(回向)이다. 그것은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서원이며, 자기의 쌓은 바 선근공덕(善根功德)을 남을 위해 돌리겠다는 회향이다. 보살은 스스로 깨달음을 여는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머물러 일체중생을 먼저 이상세계[彼岸]에 도달하게 하는 뱃사공과 같은 자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보살도 그 수행단계에 의하여 몇 가지 계위(階位)로 분류할 수 있다. 즉 초발심(初發心:최초단계로서의 진리를 추구함), 행도(行道: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려고 수행함) ·불퇴전(不退轉:도달한 경지에서 물러나거나 수행을 중지하는 일이 없음) ·일생보처(一生補處:한생이 끝나면 다음에는 부처가 됨)4단계가 있는데, 후에 화엄경에서는 십지(十地:歡喜 ·離垢 ·發光 ·焰慧 ·難勝 ·現前 ·遠行 ·不動 ·善慧 ·法雲地)로 정리되기도 하였다.

 

보살의 개념이 확대되어 미륵불(彌勒佛)이 탄생하였다. 미륵불은 미래에 성불할 자로서, 현재는 도솔천(兜率天)에 미륵보살로서 거주한다는 미래지향의 미륵신앙이 나타났다. 또한 정토사상과 관련하여 아촉불(阿閦佛:아촉보살) ·아미타불(阿彌陀佛:法藏 보살)의 관계가 성립되었다. 그리고 자비와 절복(折伏)의 신앙대상으로 관음(觀音)보살과 대세지(大勢至)보살, 반야경계통의 문수(文殊)보살, 화엄경계통의 보현(普賢)보살이 성립되고, 이어 지장(地藏)보살 등 수많은 보살들이 나타났다. 또한 보살은 실재했던 고승(高僧)이나 대학자에 일종의 존칭과 같이 사용되어 인도의 용수(龍樹) ·마명(馬鳴) ·제바(提婆) ·무착(無着) ·세친(世親) 등도 보살이라 불렀으며, 중국에서는 축법호(竺法護)가 돈황(敦煌)보살로, 도안(道安)이 인수(印手)보살로, 그리고 한국에서는 원효(元曉) 등이 보살의 칭호를 받았다.

 

나아가 범부(凡夫)의 보살은 재가(在家) ·출가(出家)를 불문하고 모든 불교도 전체로 확대되었는데, 특히 중기 대승불교 이후 성했던 여래장(如來藏) ·불성(佛性)사상과 표리관계를 이루며, 보살일체중생(산천초목도 포함)의 활동은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위로는 보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한다)’‘자미도 선도타(自未度 先度他:자신보다는 다른 사람을 먼저 제도한다)’라는 말을 낳았으며, 불교활동의 중요한 추진력이 되었다.

 

 

 

 

[5] 기독교와 불교의 참회관

 

1.기독교 참회관

참회란 : 자신의 범한 죄를 깨우쳐 회개하는 일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은 자신의 죄에 대한 인식 없이 시작되어질 수 없다.

회개 또는 죄에 대한 깨달음은 언제나 믿음보다 앞서는 것이다.

회개는 자신의 현재 상태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면서 천성 문으로 들어가려는 진지한 갈망을 내포하고 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은 인간이 자신의 죄를 회개케 하심이 많이 나타나 있다.

하나님은 자비가 풍성하고 그의 본성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그의 피조자가 불행하게 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들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33:11) 이와 같은 회개를 독촉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은 성서 속에 한없이 많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14:1) “너희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공의를 지키며 항상 너희 하나님을 발라볼지니라”(12:6)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 가 사람의 행한 대로 국문할지라. 너희는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떠날지어다 그리한즉 죄악이 너희를 패망케 아니하리라”(18:30)

이처럼 기독교의 참회(회개)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발로되었다. 하나님의 뜻은 인간을 징벌하고 멸망케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인간을 사랑하고 구원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

그러면 회개란 무엇인가? 회개는 헬라어로 (메타노이아) 돌아선다는 뜻이다.

인간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잘못된 방향으로 갈 때가 참으로 많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지 아니하고 육의 쾌락을 위해서 사는 길은 잘못된 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아니하고 자기 욕심대로 사는 것도 잘못된 삶의 방향이다 회개는 이처럼 잘못된 마음 잘못된 사상 잘못된 삶의 방향을 완전히 180도로 돌아서는 것을 말한다.

누가복음 15장에 있는 탕자의 비유는 이러한 회개의 의미를 종합적으로 잘 설명해주고 있는 비유이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너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리라”(15:17~20) 여기서 나타난 후회 회개 결단 귀환은 전부 메티노이아에 관련된 표현이다.

, 회개는 단순히 돌아서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능력에 의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것을 말한다.

회개는 일생에 단 한번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일어나는 신앙인격의 발전된 현상이라고도 할 수 있다.

회개는 모든 죄에서 참된 신앙과 삶의 방향으로 전환하는 것을 말하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참된 회개는 신앙과 성령 체험에 선행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열매와 성령의 은사로서 나타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신앙과 성령이 없는 회개는 그리스도에게로의 회심에 불과하며 믿음과 성령이 있는 회개는 올바른 깨달음과 결단이 있는 회개라고 할 수 있다.

 

 

2. 불교 참회관

불교는 깨침의 종교이다. 깨침이란 마음이 광명체가 되는 것이다. 마음이 광명으로 발광하려면 일체의 어두움이 없어야 한다. 마음의 어둠은 마음속에 스며든 번뇌 때문이다. 이 번뇌를 벗겨내려면 참회를 하여야 한다.

 

참회에는 이참(理懺)과 사참(事懺)이 있다. 이참(理懺)은 이치적으로 무엇이 어떻게 잘못되었으면 그 근원은 어디에 있었는지를 알아 다시는 그런 잘못을 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요, 사참(事懺)은 타인에게 사죄하거나 부처님 앞에서 절을 한다거나 하는 실제적인 참회의 행위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만이 다시는 그런 잘못을 반복하지 않게 되고 진정한 참회를 했다고 한다.

 

참회하는 마음은 부처님과 보살 앞에 진심으로 고백하여 죄책감을 느낌과 동시에 차후에는 다시 그런 죄를 범하지 않기로 맹세하는 자의식의 경계다. 그 의식으로 우리는 부처님과 불보살 앞에 예배하거나 경전을 독송하거나 부처님과 불보살의 이름을 부르고 기도하면서 지성껏 그 용서를 비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이 있어도 잘못임을 알아서 과실을 고쳐 선()을 행한다면 죄가 날로 사그라져 후일에 가서는 꼭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이다고 참회의 효력을 말씀하셨다.

 

부처님이 살아 계실 때에는 매달 보름날을 참회의 날로 정해 대중이 모여 지난달 지은 죄를 참회했고 안거기간 동안 저지른 잘못을 공개 참회하기도 했다. 온 정성을 다하면서 절을 하며 참회하는 방법에 대해 당나라 선도스님이 저술한 왕생예찬(往生禮讚)이 있다.

왕생예찬에 의하면 상품(上品)참회는 눈에서 피가 흐르고 몸의 털구멍에서 피가 터져 나오는 참회다. 중품(中品)참회는 눈에서 피가 나오고 털구멍에서 뜨거운 진물이 내리는 참회다. 하품(下品)참회는 눈과 코에서 피가 나오는 참회다.” 라고 하여 신체적 변화가 있으며 내부에서 터져 흘러 나오는 액루가 있어야 한다. 하루 3천배를 하고서는 눈에서 피가 흐르지 않는다. 과연 참회란 얼마나 무서운 결심이 수반되어야 하는 것인지 잘 보여주고 있다.

 

참된 참회는 자기 성품 속에서 죄의 반연을 없애는 것이다. 죄의 반연이란 삼독의 나쁜 인연을 말하며, 만약 당장에 본래의 청정한 법신을 찾고자 한다면 바로 이 삼독의 악연을 마음속에서 씻어버려야 한다. 그러면 이 삼독은 어떻게 씻어낼 것인가?

 

육조단경에서 육조 혜능스님은 참회에 대해 이렇게 설하고 있다.

“...선지식들아, 과거의 생각과 미래의 생각과 현재의 생각이 생각마다 우치와 미혹에 물들지 않고, 지난날의 나쁜 행동을 일시에 영원히 끊어서 자기의 성품에서 없애 버리면 이것이 곧 참회니라. 과거의 생각과 미래의 생각과 현재의 생각이 생각마다 어리석음에 물들지 않고 지난날의 거짓과 속이는 마음을 없애도록 하라. 영원히 끊음을 이름하여 자성의 참회라고 한다. 과거의 생각, 미래의 생각과 현재의 생각이 생각마다 질투에 물들지 않아서 지난날의 질투하는 마음도 없애도록 하라. 자기의 성품에서 만약 없애버리면 이것이 곧 참회이니라...” 육조 혜능의 참회정신을 간단명료하게 들어내고 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영단하는 것을 말한다. 이처럼 참회는 과거의 잘못을 뉘우쳐 다시는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삼독의 잘못을 알고 다시는 그러한 잘못을 짓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절단하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치 삼독을 셋으로 나누어서 한 가지씩 씻어내어야 한다. 그 요령은 108배를 하되, 부처님이 실제로 앞에 계시다고 상정하고, 한 번의 절을 할 때마다 한 가지씩 참회를 해 나가는 것이다. 우선 탐욕과 관련된 상념들을 한가지씩 떠올려서 충분히 확인하고 스스로의 성품에 반영하며, “이러이러한 욕심을 내었습니다. 잘못되었습니다. 다시는 그러한 잘못을 짓지 않겠습니다.” 하고 마음속으로 다짐해나가는 절복이 있어야 한다. 다음은 성냄에 관한 참회인데 이러이러하게 화를 내었습니다. 잘못되었습니다. 다시는 그러한 잘못을 짓지 않겠습니다.” 하고 반성해 나간다. 시기 질투하고 남 흉보는 것도 일종의 성냄이다. 역시 참회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어리석음에 관해서 참회한다. 어리석음 가운데 가장 어리석은 것은 스스로 잘났다는 아만, 자만이다. 자기를 하심하는 것이 참회이다.

 

원효의 대승육정참회(大乘六情懺悔)

원효는 참회의 방법으로 우선 사참(事懺)을 제시한다. 이는 죄를 뉘우치고 다시는 그 같은 죄를 짓지 않겠다고 부처 앞에서 맹세하는 것을 말한다. 중생은 6(六情:六根), 즉 눈 ···() ··(마음)을 통하여 만들어지는 온갖 번뇌(백팔번뇌)로 인하여 죄를 짓고, 또는 괴로워하는데, 6정 자체가 죄이므로 근본무명(根本無明)으로부터 벗어나 모든 집착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6정참회를 6(六根)참회라고도 한다. 또 참회와 해탈, 인생의 좌업(坐業)이 본래 무생(無生)임을 깨닫고 철저하게 일심(一心)으로 돌아가 본각(本覺)과 하나가 되는 것이 참된 참회라고 하여, 적극적인 참회방법을 제시하였다.

 

6(六根)

6근이란 안근(眼根:시각기관과 시각능력), 이근(耳根:청각기관과 청각능력), 비근(鼻根:후각기관과 후각능력), 설근(舌根:미각기관과 미각능력), 신근(身根:촉각기관과 촉각능력), 의근(意根:사유기관과 사유능력) 등을 가리키는데, 6근으로 인하여 저질러진 죄장(罪障)을 뉘우치는 것을 '육근참회'라고 하며, 그렇게 참회하고 6근을 끊어 깨끗해지는 것을 육근청정이라고 한다.

 

 

 

 

 

 

 

기독교와 불교의 인생관 비교

 

  기독교 불교
생명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됨
-죄로 인한 하나님과의 단절
(전적 타락의 상태)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음
지수화풍(地水火風)이라는 4대요소와 색(), (), (), (), ()5온의 5가지 요소가 모여서 생명을 이룬다고 본다.
죽음관 -죄로 인한 하나님과의
단절의 상태
지수화풍과 5온의 흩어짐, 수명이 다하고, 체온이 떠난 상태이며, 의식()이 끊어진 상태로 의식 없는 물질(無情)의 상태를 의미한다.
사후세계관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도래
-예수그리스도의 부활 신앙
삼법인설(三法印說)과 삼세윤회설(三世輪回說) 등의 이론으로 영혼불멸론과 단멸론을 부정하고 업인과보(業因果報) 사상으로 삼선도(三善道)와 삼악도(三惡道) 세계로 윤회하며 사성제와 팔정도의 수행을 통하여 생사의 고통을 극복하면 윤회에서 벗어나 해탈한다.
구원관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 받음
-믿음의 증거로써의 행위
소승불교의 구원관을 간단히 말하자면 석가모니의 가르침에 충실하여 개인의 열반을 위한 불교라면 대승불교의 구원관은 자기만의 구제보다는 이타(利他)를 지향하는 보살의 역할을 그 이상(理想)으로 삼는 구원관이다.
참회관 -회개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잘못된 마음, 잘못된 사상, 잘못된 삶의 방향에서 돌아서는 것
참회에는 이참(理懺)과 사참(事懺)이 있다. 이참은 잘못의 근원을 발견하여 다시는 그것을 하지 않는 것이요, 사참은 타인에게 사죄하거나 부처님 앞에서 절을 한다거나 하는 실제적인 참회의 행위이다. 참회의 구체적인 방법으론육조단경의 탐,,치 삼독을 108배를 하면서 제거하는 것이고 눈 ·····뜻의 6근을 참회하는 원효의 6정참회가 있다.

 

 

 

-참고자료-

 

[기독교서적]

1. 성경책

2. R.파니카 저, 김승철 역, 종교 간의 대화 (서광사, 1992). p.139~147.

3. 마스다니 후미오 저, 불교와 기독교의 비교연구

4. 조영엽 저, 조직신학 신론.인죄론 (미스바, 2000). p.395~465.

5. 밀라드J.에릭슨 저, 신경수 역, 복음주의 조직신학(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7). p.109~211.

6. 김승혜 외, 죽음이란 무엇인가?(, 1992). p.205~218.

7. 이선희 저. 웨슬리 신학의 탐구(도서출판 복음, 2002). p.15.

8. 로벳웜즈 저, 존웨슬리의신학과유산(진흥. 2005). p.37~38.

9. 강두성, 기독교란무엇인가(대한기독교서회. 1991). p.210.

[불교서적]

1. 와다나베 쏘오꼬 저, 불타 석가모니 (지식산업사, 1981). p.131~132.

2. 와다나베 쏘오꼬 저, 불타 석가모니 (지식산업사, 1981). p.137~138.

3. 와다나베 쏘오꼬 저, 불타 석가모니 (지식산업사, 1981). p.135~136.

4. 와다나베 쏘오꼬 저, 불타 석가모니 (지식산업사, 1981). p.252~253.

5.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세계종교사입문(청년사, 2003). p.148.

6.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세계종교사입문(청년사, 2003). p.150~190.

 

[기독교논문]

1. 김경재. “죽음에 대한 이해와 성찰". 1997.

[불교논문]

1. 목정배. “불교에서 본 참회”. 마음사상1. 2004. p.169~184.

2. 최인숙. “불교의 생사관념”. 석당논총29. 2000. p.104~106.

3. 최인숙. “불교의 사후세계관”. 석당논총29. 2000. p.109~116.

4. 최인숙. “불교의 관점에서 본 생명의 의미”. 석당논총33. 2003. p.106~112.

5. 최인숙. “불교의 관점에서 본 죽음의 의미”. 석당논총33. 2003. p.113~115.

 

[기독교인터넷자료]

1. ‘웨슬리의 구원론http://blog.naver.com/oxhill4952

2. ‘기독교 인생관cafe.naver.com/dhwlrtjdfud

[불교인터넷자료]

1. ‘해탈http://100.naver.com/100.nhn?docid=188044

2. ‘보살http://100.naver.com/100.nhn?docid=76172

3. ‘대승육정참회http://100.naver.com/100.nhn?docid=44994

4. ‘육근 http://100.naver.com/100.nhn?docid=123248

5. ‘팔정도 http://100.naver.com/100.nhn?docid=180740

6. ‘열반http://blog.naver.com/ksshin40?Redirect=Log&logNo=140035611523

7. ‘사성제

http://kin.naver.com/open100/db_detail.php?d1id=6&dir_id=60302&eid=IfJZMuYAoYU96yAdrIgIpZB72VGciN8T&qb=u+e8usGm

[기타자료]

1.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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