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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포트

세계 종교로 보는 ‘죽음의 의미’ / 존 바우커 / 비교종교 / 불교 힌두교 이슬람교 / 레포트

by 망고를유혹하네 2024. 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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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종교로 보는 죽음의 의미

존 바우커 지음

 

 

존 바우커는 이 책을 통해 각 종교가 말하는 죽음, 그리고 많은 철학자들이 이해하고 있는 죽음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우리에게 설명해주고 있다.  그 중 이슬람교, 힌두교, 불교에서 말하는 죽음에 대해 살펴보자.

 

 

첫 번째 이슬람교의 죽음의 의미

 

책에 나온 이슬람교의 죽음에 대해 읽어보면서 이슬람교도 죽음은 하나님에게 속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선 책에 나온 이슬람교와 죽음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할 것이다.

역사적으로 이슬람교는 하나님의 본성에 대한 여러 상반되는 주장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절대적 진리를 발견하려고 추구했던 청년 무함마드에게서 시작 되었다. 무함마드는 한동안 고독 속에서 하나님의근원적이고 근본적인 진리를 찾으려고 전력을 다해 기도했다. 히라산 중턱의 한 동굴에서 그러한 실재에 대한 압도적인 감각이 무함마드에게 휘몰아쳤고, 그에게 강렬한 인상을 새겼다. 그리고 무함마드에게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에게 주시는 말씀을 말하도록 요구하였다. 꾸란은 일상적인 무함마드의 언설 및 대화와는 눈에 띄게 다르며 하나님에게서 직접 온 것이라고 믿어졌던 이후 무함마드의 모든 말씀을 모아 놓은 모음집니다. 무함마드와 그의 첫 번째 추종자들은 꾸란의 말씀이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나왔으며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곧은 길을 열어 준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이 존재하며 하나님은 단 한분 뿐이라는 확신에 사로 잡혔다. 모든 창조의 근원이며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만드신 한 분 하나님이 존재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우리는 이슬람교의 죽음 이해가 꾸란에서 그리고 하디스에서 나타난 꾸란의 실제적 해석에 따라 정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죽음은 창조된 질서의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뜻에 속박하며 하나님의 허가 없이는 일어날 수 없다고 한다. 따라서 이미 가장 초기부터 죽은 몸의 부활이 주장되어 온 것이다. 죽음 몸의 부활을 이야기 하는 이슬람교의 방식은 약속과 위협이 일반화가 되었다. 이슬람교의 죽음의 목적은 유예기간을 한정하며, 유예기간 동안 개인들은 하나님의 창조적인 의지가 결정하고 허락되는 한도 안에서 자유롭게 자신의 삶을 살 수 있다. 즉 하나님을 향한 곧은 길로 향하거나 혹은 하나님을 거부하고 부인했던 불신자들에게도 동참할 수 있다고 한다. , 살아있는 기간은 집행유예 또는 시험의 기간이라고 이슬람교는 이해하고 있다. 따라서 이슬람교에서 말하는 죽음은 그것 자체로서의 형벌은 아니며 죽음은 부활과 최후의 심판에서 절정에 달하는 훨씬 더 긴 기간 가운데 단지 하나의 특수한 단계가 끝나났다고 말하였다. 이슬람교는 말한다. 그리고 이슬림교의 예언자와 꾸란은 말한다. 일단 한 사람이 죽어서 무덤 속에 이르면 갑자기 두 천사가 나타나서 그를 깨우고 그의 영혼은 몸으로 되돌아간다고 말이다. 그러나 무덤 속 형벌에 대한 모든 정교화에도 불구하고 죽음의 발생이 시험 혹은 시험 수단이 될 수는 있겠지만 죽음 자체는 형벌이 아니며, 형벌은 심판 이후 무덤 앞에 그리고 과정의 마지막에 놓였다고 하였고, 죽음은 단지 집행 유예기간이 자연스럽게 끝난 것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하나님이 생명에게 내리신 시험이라는 맥락에서 무슬림이 죽음을 묘사하는 특징적인 말에서 나타난다. 신앙의 세계에서는 불신자들은 자한남의 불 속에서 영원히 탈것이라고 언급하였다. 영혼은 곧 임시적인 몸속에 부활되어서 천사들에게 질문을 받고 최후의 심판까지 잠정적인 운명을 얻는다고 하였다. 꾸란에서는 부활과 심판의 날이 종종 서술된다. 이슬람교는 행위에 의한 구원의 종교처럼 보일수도 있지만 만약 이슬람교가 행위에 의한 구원의 종교라면 그것은 하나님에 의해 허락 되었으며 하나님의 자비, 은총, 하나님의 뜻과의 협력 속에서 이루어진 행위에 의한 것이다. 또한 이슬람교에서는 어떤 것을 행하는 의도가 행동을 평가하는 데 본질적인 부분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꾸란에서는 자비롭고 모든 것을 용서하는 분이라고 끊임없이 묘사되는 하나님께로 회개하며 돌아갈 가능성이 항상 열려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자비를 전제하더라도 선이든 악이든 어떤 것도 손실되지 않으며 모든 사람은 정확한 저울에 따라 보상받는다는 사실이 여전히 남아있다. 죽음 이후 죽은 사람 뒤현에는 그가 시험의 시기를 다시 살아가려고 이 세계로 되돌아오는 것을 막기 위해 벽이 세워진다. 좀 더 정확하게는, 한 사람의 덕행과 다른 사람들의 악행 사이에서 어떠한 거래도 이루어질 수 없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어떻게 속죄에 영향을 미치는 지에 대한 모든 기독교인의 이해는 말할 것도 없고 어떤 의미에서도 구속 혹은 속죄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무슬림들은 예수가 죽었다는 것도 전혀 믿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은 충실한 예언자인 예수를 유대교 경전의 에녹과 엘리야처럼 죽음을 면제시켜주고 곧바로 낙원으로 보내줌으로써 보상해 주었다고 생각한다. , 그들은 예수의 죽음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이슬람교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 구원을 위하여 행하셨던 것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를 철저히 부인한다. 무슬림의 시각에서 예수는 무함마드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바쳐야할 계산서에 대해 그들에게 경고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보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심지어는 자기 자신을 위한 속죄도 있을 수 없다고 한다. 꾸란은 심판의 날에 다른 사람의 중재에 의존 하려는 것을 경고한다. 그러나 지속되는 업적들과 중재라는 약간의 예외들에도 불구하고, 꾸란의 변함없는 주제는 분리이다. , 궁극적으로 낙원의 보상으로 들어가는 사람들과 지옥의 화염속으로 들어가는 자들 사이의 그리고 좀 더 직접적으로는 이승에서 스스로 이슬람교의 하나님을 향하는 자들과 그렇지 않은 자들 사이의 분리이다. 그러나 영환 동안이든 오랜 기간 동안이든, 그들이 견디는 동안의 형벌은 생생하게 보사하며 낙원의 기쁨도 생생하게 묘사한다. 적어도 지옥과 관계된 형벌은 가혹하다. 무슬림에게 천국은 하나님과 함께 있고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이 아닌 무슬림들에게 천국은 미래에서 뿐만 아니라 지금 이미 하나님과 함께 있으며 이슬람교는 대체로 낙원과 불지옥에 대한 묘사들이 은유적이거나 신화적이지 않다고 대단히 열정적으로 주장한다. 결과적으로 무슬림에게는 낙원이나 화염 속에 있다는 것은 단지 하나님이 창조하신 또 다른 부분 안에 있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것들을 영원하게 하는 수단들을 계속 창조하신다. 따라서 이슬람교는 심판의 날을 또한 분별의 난이라고 한다. 그때 의로운 자들에게 이 세상에서의 불행은 다음 세상의 선한 것들로 교환되며 분별의 날에 아직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있는 것으로 보이는 지상의 일반적 논쟁과 특수한 논쟁들이 해결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꾸란의 힘은 모든 사람들이 자기 앞에 놓여있는 문제들을 인지하고 자기가 살아가면서 행하는 모든 일들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호소의 단순성에서 나온다. 부활의 날은 확실히 온다고 한다. 꾸란에서 부활의 날을 강조하는 것은 무함마드가 마주쳤던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부활은 사람이 죽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한 명백한 관찰과 상충되기 때문이다. 모든 것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왔고 단지 그의 뜻의 결과로 존재하기 때문에 생명과 죽음의 처분은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달려있으며 누구든 심판을 위하여 영혼과 몸이 부활하고 재결합하는 것을 의심하는 자는 첫 번째 창조의 기적과 경이를 생각하도록 권고한다. 생명으로부터 무덤을 통해 부활과 심판에 이르는 과정에 대한 꾸란의 세부적인 설명은 많은 부분에서 상당히 생생하다. 이슬람교에서는 애도 자체를 과도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그 이유는 무함마드는 죽음의 순간까지 비탄을 허락했으며 이슬람교에스는 죽은 자를 위한 울부짖음이 무덤 속의 죽은 자를 방해한다는 깊은 전통이 있다. 하지만 우는 것을 무함마드는 허락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금지 된 것은 과도한 울음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창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방식과 뜻을 수용하는 것과 모순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무슬림의 죽음 이해는 이 책의 전반부에 나타난 죽음에 대한 설명들과 많은 부분에서 모순된다. 이슬람교는 확실히 중간적인 임계성의 중요성을 예시하며 모든 주여 종교들 가운데 이슬람교는 중간 단계인 무덤 속의 기간을 가장 명확하게 문자적으로 a사하나 이슬람교는 중간 조건에 있는 사람들이 최종 상태로 이행하는 것을 돕기 위해 의례들을 베풀지 않는다. 사실 그 반대라고 한다. 꾸란은 낙원과 불지옥에 대해 서술하면서 그리고 어떻게 후자가 아니라 전자에 확실히 들어갈 수 있는지를 설명하면서, 분명히 매우 구체적이고 문자적이다. 왜냐하면 이슬람교는 초기가 아니라 후기의 종교 전통 형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슬람교는 서구의 종교사와 종교 전통에서 가장 극단적으로 형식화된 죽음 이해를 대변한다. 따라서 신앙을 버리지 않고서도 그것들을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었고, 전동의 선별 과정은 아직도 계속 되고 있다. 이슬람교는 꾸란의 언어를 잠정적인, 대략적인, 혹은 수정할 수 있는 언어로 해석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반드시 거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슬람교는 죽음 이후 인간 생명의 최종적 결과를 나타내는 문자적이고 틀림없는 하나의 그림을 믿는다.

 

 

두 번째, 힌두교의 죽음

 

힌두교에서 가장 현저하게 나타는 것은 다양성에 대한 긍정이다. 힌두교 에서는 상이한 역사와 상이한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이 그런 역사와 환경을 보다 바람직한 결과로 전환시키는 데에 있어 각각에 상응하는 다양한 기회들을 필요로 한다는 점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오늘날 이른바 힌두교라고 알려져 있는 것, 목표에 이르는 길들의 복합체는 어떠한 개인도 대상의 전체를 볼 수 없으며 더군다나 전부를 이해할 수는 없다고 여긴다. 힌두교는 어떻게 하면 각자의 길에 맞게 살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다루는 하나의 지도라 할 수 있다. 그것은 각자가 서로 상이한 환경 속에서 스스로를 어떤 식으로 발견하든 간에 이런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궁극적으로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길을 묘사해 보여주고 또 상기시킨다. 이것은 바가바드 기타에 핵심적인 주제이다. 바가바드 기타는 힌두인들에게 가장 중요시 되는 거룩한 문헌이다. 바가바드 기타는 인도 종교를 이해하고자 할 때 그 출발점으로 적합하다고 한다. 죽음의 문제에 있어서는 바가바드 기타가 중요하다. 바가바드 기타에서는 죽음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바가바드 기타의 주요 부분은 아르주나의 태도에 대한 크리슈나의 반응으로 구성되어 있다. 크리슈나는 아르주나가 죽음에 대해 잘못된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즉 크리슈나에 의하면 육신을 입은 자아는 영원한 것이고 따라서 몸이 죽는다 해도 자아는 죽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크리슈나는 만일 참된 인격체인 육신을 입은 자아가 우연한 사건이나 죽음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한다. 이와 반대로 아르주나는 주저 없이 전쟁을 해야 한다고 한다. 바로 자아란 죽지 않으며 영원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에 있다. 이 점을 깨닫고 그런 지혜의 상태를 획득 할 때 우리는 브라만을 얻을 수 있다고 힌두교는 말한다. 브라만은 힘 특히 모든 형상 있는 것들의 절대적인 원천이자 스스로 존재하면서 만물을 낳은 조물주임을 제시하고 있는 경전으로 읽히고 있는 우파니 샤드에서는 브라만이 무엇인지 이해하는데 있어 절대적 원천 외에도 여러기지 키워드 등이 있음을 제시하고 있는 경전이다. 또한 브라만의 의미는 시간 계적 불 혹은 프라자파티신 등으로 크리슈나를 지칭하거나 베다를 지칭하며 혹은 제의에서의 희생 제물을 가르키기도 한다. 그러므로 힌두교에서의 니르바나는 불교에서 말하는 닙바나 혹은 니르바나와는 전혀 다른 것이라고 한다. 자아는 원래 불변이다. 하지만 현상에 집착하는 자아는 자유에로의 길을 찾아내기까지 되풀이하여 태어난다. 카르마란 도덕적 삶에는 법칙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중력의 법칙처럼 비인격적이고 피할 수 없는 것이어서 동일한 원인에 대해서는 동일한 결과를 낳는다고 하는 것이다. 참된 자아인 브라만은 죽지도 않고 파괴 될 수도 없기 때문에 윤회의 부단한 흐름 속에서 지바는 다시 나타난다고 한다. 하지만 아무리 오래 지속 된다고 해도 재생의 상태는 영원한 것이 아니다. 만일 무한한 재생의 사슬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이 가능하다. 전체를 아는 자가 되려면 인간이 스스로를 더욱 깊이 세상에 내던짐으로써 카르마와 인과의 무한한 과정을 멈출 수는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왜냐면 행위는 계속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힌두교에서 말하는 죽음은 결코 부정적인 것은 아니라고 한다. 윤회의 기나긴 연속 안에서 죽음은 여러번 일어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죽음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죽음의 사건은 기나긴 과정 안에서 하나의 준비 단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관념은 이슬람교를 상기시키지만 이슬람교에서는 오직 하나의 최초의 죽음이 있을 뿐이며 그 다음에는 심판이 있다. 하지만 힌두교의 경우는 지바가 하나의 출생에서 다른 출생으로 넘어가면서 죽음의 무한한 반복이 있을 따름이다. 이때 환생은 이전에 사라져 버린 것에 대한 냉정하고 공평한 심판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실로 비인격적인 인과의 현현이다. 사람이 죽게 되면 지속적인 자아가 함께 없어진다고 하는 신앙은 슬픔이아 애도에 집착해서는 안된다고 하는 힘두인들의 관념안에 반영되어 나타난다. 힌두인들은 적절한 제의와 기도를 통해 사자의 영혼이 저승길로 가는 여행을 도와줄 따름이라고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의 순간 혹은 죽음의 사건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사자의 영혼은 죽음의 순간에 실제로 스스로 자신을 도울 수도 있고 혹은 도움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인도의 전통에 한하여서는 죽음이 종교의 기원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인도의 전통에 있어 가장 초기의 문헌들 특히 베다 문헌들에서는 바가바드 기타를 통해 살펴본 우주론적, 인류학적 유형의 흔적이 거의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베다적 견해에 있어서는 설령 죽음이 100년 동안 연기된다 하더라도 영원히 연기될 수는 없다. 죽음이라는 것은 근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한 개인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그들의 원천으로 되돌아가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들 또한 죽음을 저지하고 그들 자신의 불멸성을 획득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처럼 죽음에 저항하려는 시도에 있어 신들은 강력한 조력자를 가지고 있다. 그 조력자는 바로 소마이다. 소마는 베다 시대의 희생 제의에서 신들에게 바쳐지던 중요한 신주였다. 인도에서 중요한 모든 것들이 그러하듯 소마 또한 신으로 인격화 되어있다. 힌두교의 죽음에 관한 가장 기본적인 사실은 죽음의 반복이다. 이는 우리를 후대의 윤회와 재생에 관한 교의에 매우 근접한 곳으로 데려다 준다. 물론 아직 재생에 관한 언급은 나오지 않았다. 죽음을 서두르는 것은 죽음에 구속당한 것이 된다. 하지만 모든 죽음이 다 그렇게 자연스러운 것만은 아니다. 죽음은 수 백개의 문을 통해 쳐 들어온다. 희생으로서의 죽음에 의해 형성된 전체 우주에 관한 이 인상적인 베다적 비전은 우주 안에 있는 역동적인 힘들을 신으로 인격화 하는 데에서 가장 즉자적인 표현을 드러낸다. 죽음에 세 가지 주요한 대표자는 야마, 칼리, 시바이다. 야마는 최초의 죽는 신이자 동시에 사자를 자신의 영역으로 인도하는 조상의 지배자이기도 하다. 칼리는 시바의 배우자 여신으로서 인격화 되어 있다. 칼리 여신은 잔인하다고 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칼리 여신을 숭배하는 까닭은 바로 재생의 기나긴 반복속의 어떤 시점에서 우리 모두는 시간의 과정과 타협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을 칼리 여신이 주관한다는 것이다.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힌두인들은 죽음에 의해 방해받아서는 안된다고 여긴다. 이것은 근본적인 덕성이며 다른 사람의 생명을 취하는 다르마 사이의 명백한 모순 밑에 깔려 있는 것이다.

 

 

 

세 번째, 불교의 죽음

 

죽음에 관한 불교적 이해는 고타마의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에 있었던 유명한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고타마는 어린시적 아버지에 의해 왕궁 안에서만 지내게 되었다. 그 안에서 고타마는 아름답고 기쁨만 가득한 온실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고타마는 마부에게 명하여 왕궁 밖으로 나갔다. 거기서 그는 길 옆에 누워 있던 병자를 보았고 이것이 고타마에게 최초의 장애와 혼란의 경험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나갔을 때에는 늙은이를 보았고 세 번째에는 화장 준비 중인 시체를 보았다. 그는 왕궁 내에서의 안락한 삶과 대조되는 광경을 보면서 절망적인 심정에 빠지게 되었고 그는 치유책 혹은 질병과 죽음에 저항 살 수 있는 방도를 찾아 네 번째 외출을 하였다. 이때 그는 삭발한 수행자를 보았다. 즉 고행자를 본 것이다. 고행자들은 현세에서의 모든 세속적인 문제들로부터 초연하기에 힘쓰면서 죽음을 기다리는 자들이었다. 그래서 고타마는 즉시 왕궁을 떠나 고행의 길로 들어갔다. 고타마는 계속적이고 극단적인 고행을 계속하였다. 그럼으로써 그는 쇠퇴와 죽음의 과정에 의해 방해를 받아 도달할 수 없는 자기 자신 안의 어떤 절대적인 실재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 했던 것이다. 결국 그는 모든 고행들이 자신을 죽음으로부터 구원해 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타마는 고행의 실천은 그저 재생의 과정을 환희의 천상으로 옮겨 놓을 수 있을 따름이라고 생각하였다. 붓다가 깨달은 진리는 둑카의 네 가지 본질에 관한 것이다. , 둑카는 만물의 변화와 무상 및 여기에 불가피하게 수반되는 고통에 종속시킨다. 물론 무상이야말로 모든 만물의 진리임을 깨닫는 것은 동시에 둑카가 어떻게 생겨나는지를 보는 것이다. 만일 둑카가 어떻게 생겨나는지를 볼 수 있다면 둑카의 소멸에 무엇이 연루되어 있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붓다의 깨달음은 내면에 있어 이런 진리를 철저하게 근본적으로 인식한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을 얻자마자 붓다는 무상과 덧없는 변화의 모든 과정으로부터 초연한 상태 안에서 안식을 얻었다. 둑카의 소멸을 헤치고 나아가기 위해서는 불변의 자아란 없으며 내가 나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이런 형상의 모든 측면이 결국에는 변하여 죽음에 이르게 된다고 하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한다고 한다. 그러무로 곧 죽음이란 칸다가 산산 조각으로 해체되는 것을 가리킨다. 여기서 말하는 칸다란 바로 인간을 구성하는 오온의 복합체인데 오온은 루파, 베다, 산나, 삼카라, 빈나나 이렇게 다섯 가지이다. 붓다는 오직 존재하는 것은 칸다 뿐이므로 다시 태어나는 불변의 자아란 없다고 하였고, 누구도 모든 죽음은 곧 칸다의 해체를 뜻하는 사식, 그리하여 죽음의 문제는 결국 살아있는 모든 것은 죽어서 다른 몸으로 전이 한다라는 식의 결론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죽음이 소멸 혹은 망각이라는 것을 어떤 결과도 수반하지 않은 채 형상을 가진 생명체의 종말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지속적인 불변의 자아가 없으며 오직 연속성 그 자체만이 있다고 한다면 불교도들이 참으로 환생을 말할 수 없는 이유가 분명해진다. 왜냐하면 다시 태어날 만한 실체라든가 자아 혹은 영혼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사람이 죽으면 아직 다 고갈되지 않은 카르마의 영향력이 한 군데로 모여 적합한 현현을 위한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여기서 적합하다는 것은 즉, 선하든 악하든 축적된 카르마에 상응한다는 말이다. 죽음의 계기는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현상 세계가 현재 상태를 넘어선 곳에서 완전히 다른 산물로 재구성 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죽음은 네 가지 이유 때문에 일어날 수 있다고 한다. 첫째, 오온의 연속성을 위한 자연의 기간이 다 찼을 때 죽음이 일어난다. 둘째, 특별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카르마가 다 고갈되는 지점에 이르렀을때 죽으이 일어난다. 셋째, 앞에서 말한 두가지 모두가 발생할 때 죽음이 일어난다. 넷째, 파괴적인 카르마가 이와 같은 죽음의 결과를 요구할 때 죽음이 일어난다. 불교에서 죽음의 계기는 죽어가는 사람은 사우의 다음 생애에 무엇으로 태어날지에 관한 징후를 보이기에 중요하다. 이 징후는 과거에 그가 행한 선한 카르마나 혹은 악한 카르마의 드러남 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편 죽음의 순간에 카르마의 힘은 하나의 이미지를 의식하게 된다. 그것은 과거의 모든 경험들이 주마등처럼 다시 나타나는 이미지이다. 그러므로 불교도에게 있어 죽음은 오직 모든 것이 덧없다고 하는 인식이 실제적이고 절대적이 될 때 끝이 나는 그런 하나의 과도기 혹은 전이로 간주될 따름이다. 불교는 힌두 종교의 전통을 이은 은유의 방향으로 전개된 것임을 알 수가 있다. 원래는 희생이라는 범주를 통해 죽음의 의미와 의의에 대한 가장 오래된 고대적 설명 체계가 형성되었지만 이제 불교에 이르러 희생의 범주는 쇠퇴하고 말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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