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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y/기독교 관련

쯔빙글리의 생애와 신학

by 망고를유혹하네 2024. 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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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 차 -

 

 

 

[1] 쯔빙글리의 생애 (p.2)

 

[2] 종교개혁 이전의 쯔빙글리 (p.2~3)

 

[3] 쯔빙글리와 취리히 종교개혁 (p.3~4)

 

[4] 쯔빙글리의 종교개혁과 신학논쟁들 (p.4~5)

1) 1차 논쟁

2) 2차 논쟁

3) 로마교회와의 분리

4) 교회 개혁

5) 쯔빙글리와 베른 교회

 

[5] 쯔빙글리와 루터 (p.6)

 

[6] 쯔빙글리의 신학 (p.6~8)

1) 신론

2) 그리스도론

3) 성령론

4) 영성과 사회 정의

5) 세례와 성만찬 논쟁

 

[7] 쯔빙글리의 시대적 의미 (p.8~9)

 

 

 

 

 

쯔빙글리의 생애와 신학

 

16세기는 놀라운 변화의 시기였다. 유럽의 각처에서는 교회개혁을 부르짖으며 종교개혁의 불씨는 활화산처럼 타올랐다. 취리히의 종교개혁을 주도했던 쯔빙글리, 그러나 그의 신학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쯔빙글리의 비극적인 죽음 때문이었을까? 그는 15311011일 제2차 카펠 전투에서 종군목사로서 종교개혁의 이념을 방어하다가 비운의 죽음을 당했다. 이러한 그의 죽음은 후대에 그의 신학과 삶에 대한 부정적인 영향을 미쳐왔다. 루터와 칼빈의 그늘에 가려 서였을까? 그러나 영국을 거쳐 미국에서 전개된 개혁교회와 장로교회의 발전은 쯔빙글리 없이는 불가능했다.

 

 

1. 쯔빙글리의 생애

쯔빙글리는 148411일 토겐부르그의 빌트하우스의 부요한 가문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신앙심이 깊은 부모와 베젠의 공작인 숙부에게서 카톨릭 종교교육을 받았다. 쯔빙글리는 아주 어려서부터 정직성을 가졌으며, 그는 149410세 때에 바젤에 있는 그레고르 분즈리가 운영하는 성 테오도르 수도원의 라틴학교에서 3년간 중등교육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특히 라틴어와 음악, 변증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1498년 쯔빙글리는 베른 대학에서 수학했으며, 1500년부터는 비엔나 대학에서 공부하였고, 1502년 바젤로 돌아가 성 마틴학교에서 라틴어를 가르쳤다. 고전 연구를 계속하여 1506년 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1522년 말 안나 라인하르트와 결혼했고, 4명의 자녀를 두었다.

 

 

2. 종교개혁 이전의 쯔빙글리

1498년 쯔빙글리는 베른 대학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했다. 그는 당시 최대의 고전학자요, 스위스의 시인이었던 하인리히 뵐프린 밑에서 공부하였다. 또한 1500-1502년 동안엔 비엔나 대학에서 공부하였고, 1502년 바젤로 돌아가 성 마틴학교에서 라틴어를 가르쳤으며, 고전 연구를 계속하여 1506년 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 시기에 쯔빙글리는 인문주의자 토마스 비텐바하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그의 성서가 유일한 권위와 그리스도의 죽음이 죄 용서의 유일한 대가라는 것과 면죄부의 무용함에 대한 가르침은 쯔빙글리를 자연스럽게 기독교 믿음의 초기 원천으로 돌아갈 것을 열망하게 했으며, 일반적으로 미신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비판하는 인문주의자가 되게 했다.

쯔빙글리의 글라루스에서의 목회기간(1506-1516)은 그가 충실한 로마의 심복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는 당시 통용되던 성직매매를 통해 콘스탄스의 감독에게 사제직을 받았고, 1506929일 뷜트하우스 본당에서 첫 미사를 집전했다. 교황은 쯔빙글리에게 50굴덴이라는 당시로서는 적지 않은 연금을 지급한데서도 그가 로마 교회의 충실한 심복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쯔빙글리는 교황을 수호하는 스위스 연방의 정치적 노력을 국가적 영예라고 믿고 있었으나, 1513년 노바라 전투와 1515년 마리그나노 전쟁에서 참혹스런 패배를 경험하면서, 그때까지 품었던 전쟁에 대한 낭만적인 환상을 버리고 평화주의 사상가로 전환하기 시작한다. 그 후, 쯔빙글리는 스위스의 용병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게 되었고, 이러한 용병거부 투쟁은 쯔빙글리 종교개혁의 실마리를 제공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쯔빙글리는 1514년부터 1515년 초에 걸쳐 읽은 에라스무스의 인간에 대한 그리스도의 불만을 통해 깊은 감명을 받았다. 모든 구원에 대해 오직 그리스도만(Solus Christus)"이라는 에라스무스의 사상은 쯔빙글리의 종교개혁의 위대한 이념으로 등장하게 된다. 또한 쯔빙글리는 글라우스에서 거주하는 동안 에라스무스와 교제하였다. 에라스무스와의 개인적인 만남은 이후 그의 신학 방향에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는데, 그는 에라스무스적인 성서주의와 개혁의 프로그램에 완전히 동의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51710월 말 루터의 면죄부 사건이 비텐베르크로부터 터져 나왔다. 1518년 아인지델른에 프란시스회의 면죄부 판매인인 버나르디노 삼손이 왔을 때 쯔빙글리는 강경한 어조로 면죄부 판매 행위를 비난했으며, 그는 오직 그리스도의 구원하시는 공로를 의지하라고 백성들에게 촉구했다.

1518년 쯔빙글리는 취리히 대성당의 유급 사제로 선출되어 151911일 취임하였다. 그는 전통적(스콜라) 해석에 의지하지 않고 한절한절 마태복음부터 성서 주석을 시작하였다.

1519년에 페스트에 전염되어 거의 죽을 뻔하였는데, 이 체험은 진지한 자기 성찰을 촉발시켰고 하나님의 사명에 대한 강한 의식을 일으켰다. 그의 영적 생활은 그 다음해 동생의 죽음을 통해 더 깊어졌고, 같은 해 그는 교황이 주는 연금을 사절했다.

 

 

3. 쯔빙글리와 취리히 종교개혁

쯔빙글리는 1520년 이후 에라스무스적인 영향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교황으로부터의 연금도 거부하고, 루터에 대해서도 과감하게 지지하고 나섰다. 그는 루터의 종교개혁의 정신을 추종했고, 점점 인문주의 정신과는 멀어져 갔다. 적어도 쯔빙글 리가 보기에 인문주의적 개혁 프로그램에는 여전히 전통적 권위들(성서, 교리, 공의회, 교황권)이 보존되며, 개혁으로서는 불충분한 것이었다. 그의 비판적 설교는 수도사들의 도덕적 타락, 당시 경제의 근간을 떠받치고 있던 십일조에 대한 공격, 성자 숭배에 대한 배척, 미사의 지루한 절차에 대한 것이었다.

또한, 그는 계속해서 용병제도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하는 설교를 했고, 취리히 시 의회는 결국 15231월 용병제도를 폐지하게 되었다.

쯔빙글리의 종교개혁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522년이었다.

그 해 3월 일부 시민들은 칭의에서 성서의 유일한 권위를 주장한 쯔빙글리의 말을 인용하면서 사순절 금식을 지키지 않았다. 쯔빙글리는 그의 설교 음식의 선택과 자유에 관하여에서 하나님의 법인 성서로부터 음식에 관한 어떤 특정한 규칙을 이끌어 낼 수 없으며, 구원은 이런 것에 의존되지 않는다고 못박았다. 이에 대한 주의 시 정부는 신약성서는 금식을 의무로 하지 않았으나 좋은 의식으로서 준수되어야 한다고 판결하였다. 이 타협안은 사실상 주교의 사법권을 거부하고, 취리히 교회를 수중에 장악했다는 의미에서 중요한다. 금식에 대한 루터와 쯔빙글리의 차이는 루터가 율법으로부터 그리스도의 자유를 말한다면 쯔빙글리는 자유를 인간적인 관습들과 규례들에만 국한시켰고, 복음은 이미 하나님의 율법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금식문제에 이어 성자숭배 문제와 수도원 생활양식이 논쟁의 초점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수도사들은 성자숭배를 비판한 쯔빙글리를 반대했다. 이에 탁발 수도사들의 설교내용을 주제로한 대토론이 취리히의 모든 지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되었고, 그 결과 1522721일 의회의 대표단은 쯔빙글리의 방식대로 성서적 설교를 하도록 수도사들에게 명령했다.

또한, 쯔빙글리는 15227월 주교에게 사제들의 결혼을 허락해 달라는 청원서를 올렸고, 이에 대한 주교의 응답이 없자 그는 1522년 말 비공식적으로 안나 라인하르트를 부인으로 맞아들였다. 그 후 152442일 공식적으로 결혼하였다.

외텐바하의 도미니크 수도회에서 행해진 쯔빙글리의 유명한 설교인 하나님의 말씀의 명료성과 확실성에 관하여에서 그는 성서원리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밝히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적이므로 이 말씀은 교부들이나 공의회를 통해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성령을 통하여 인간에게 전달한다. 따라서 성령 이외에 어떤 권위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접촉점이 될 수 없다는 것이 그것이다. 또한 쯔빙글리의 마리아에 관한 설교에서 하나님의 어머니로 불리며 구원의 중재자로 보고 종교적으로 숭배했던 기존의 입장을 철저하게 배척했다. 쯔빙글리는 단지 마리아를 도덕적이며, 겸손하고 믿음의 모범이 되는 여인으로 보았다. 이러한 쯔빙글리의 설교는 수녀원을 와해시켜나갔으며, 15237월이 되자 많은 수녀들이 수녀원을 떠나 결혼을 했다.

도미니크파와 아우구스티누파, 성프란체스코파는 도시에서 교육을 맡고있던 중요한 수도회들이었는데, 취리히 정부는 이 수도회들에게 전통저인 스콜라 철학에서 손을 떼고 순수하게 성서만을 설교하라는 명령을 내림으로써 쯔빙글리의 개혁운동에 손을 들어 주었다.

 

 

4. 쯔빙글리의 종교개혁과 신학 논쟁들

1) 1차 논쟁

루터 사건에 비견되는 쯔빙글리의 논쟁은 1523129일 제1차 취리히 논쟁에서 시작된다. 이 논쟁은 스위스와 독일을 비롯한 외부 세계의 이목을 취리히로 집중하게 만들었다.

15231월 취리히 시의회에서는 성직자들간에 분분한 교회의 문제에 관하여 성경만을 표준으로 하는 공개토론을 명령했다. 이 토론을 위해 쯔빙글리는 짧은 형식의 67개 조항을 준비했다. “67개조 논제를 통해서 쯔빙글리는 복음이 교회로부터 아무런 권위도 얻지 않으며, 오직 구원은 믿음으로만 가능함을 확인했다. 또한 미사의 희생제사적 성격, 선행의 구원적 효과, 중재자로서 성자의 가치, 수도원 서약의 구속성, 연옥의 존재 등을 부정했다. 그는 그리스도가 교회의 유일한 머리임을 선언했고, 성직자들의 결혼을 옹호했다.

6백명 이상 참석한 이 토론에서 시의회는 쯔빙글리의 손을 들어주었다. 성서의 기준에 의해 판단해 볼 때, 그는 이단도 혁신자도 아니라고 하였으며, 다른 모든 사람들은 복음과 성서에 의해 지지될 수 있는 것만 설교해야 한다고 명령했다.

 

2) 2차 논쟁

성상 파괴 폭동을 포함하여 도시 안에 긴장이 고조되자, 쯔빙글리와 그의 동료 목사 레오 주드는 미사와 성상의 사용을 다루는 또 다른 공개 토론을 제의했고, 152310월에 심의회 형식으로 열린 2차 토론에는 약 9백명이 참석했다. 쯔빙글리와 주드는 성상숭배를 공격하고, 미사의 희생제사적 성격을 부인했다. 또한 평신도에게 떡과 잔을 주는 것에 대한 성서적 근거를 주장하고, 모국어 예배를 요구했다. 이에 대해 심의회는 주장들 중 일부만을 수용하며 신중한 입장을 취했다. 심의회는 라틴어 미사와 떡만 주는 것을 고수하고, 교회로부터 개인 소유성상만 조용히 제거할 것을 허락한 것이다.

 

3) 로마 카톨릭과의 분리

15246월과 7춸 일단의 노동자들이 시의회의 명령을 받아 시의 7교회로부터 강제로 성화와 조각과 유골을 제거했고, 대 민스터교회에서 오르간을 벽으로 봉해버렸는데, 이는 로마와 공개적으로 분리하게 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그해 12월 수도원들이 해체되었고, 그 재산들은 교육과 빈민구제를 위해 사용되었다. 1525년 수난주간이 되어서는 미사 역시 폐지되었다.

 

4) 교회 개혁

이제 성만찬에서는 평신도에게 떡과 잔을 모두 주게 되었고, 모국어로 드리는 예배가 확립되었다. 주교의 사법권은 폐기되었고, 형식적인 예배를 탈피하여 예배는 설교가 중심이 되었으며, 옛 예배의 교리와 의식의 특징들이 제거되었다. 쯔빙글리는 그의 저서 참 종교와 거짓 종교 해설을 통해 이러한 변화를 설명하고 있다.

쯔빙글리는 스위스의 다른 지방과 인접 독일 지역의 교회 개혁에 열정적으로 협조했으며, 바젤은 1529년 미사를 폐지했고, 스위스 칸톤 중 가장 큰 베른은 복음주의의 많은 준비와 노력, 그리고 쯔빙글리가 주도한 공개토론에 힘입어 1528년 개혁에 성공했다. 또한, 독일의 남부 도시 슈트라스부르크가 루터보다 쯔빙글리의 견해로 전향한 것은 중요한 사실로 언급되고 있다.

 

5) 쯔빙글리와 베른교회

쯔빙글리의 종교개혁에서 베른의 교회개혁을 빼놓을 수 없다.

루터와 라이프찌히에서 논쟁을 벌인 적이 있던 잉골슈타트 대학의 요한 엑크교수는 1524년 쯔빙글리와 토론할 것을 제안했고, 쯔빙글리도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만 논쟁을 결정할 재판권을 누가 갖는가의 문제와 농민폭동에 의해 토론은 성사되지 못했다. 요한 엑크교수는 1525년 다시 바덴에서 토론회를 개최할 것을 스위스 연방에 공식적으로 제출하지만, 취리히 측에서는 바덴이 가톨릭의 다수를 차지하는 지역이며, 신변적인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 토론회는 쯔빙글리가 불참한 가운데 1526519일 바덴에서 개최되었다. 가톨릭 주들은 엑크에 의해, 개신교 주들은 바젤의 요하네스 외콜람파디우스에 의해 통솔되었다. 외콜람파디우스는 쯔빙글리의 대리자로 충실히 취리히의 입장을 옹호했다.

이 토론회는 16일간이나 지속되었으며, 엑크는 자신의 논제를 방어하는데 성공했다. 쯔빙글리의 가르침은 이단적인 것으로 정죄되었고, 기존의 예배관습들을 불가침한 것으로 확립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결정에도 불구하고 가톨릭과 개신교 양쪽에서 머뭇거리던 주들은 종교개혁에 대한 가톨릭 주들의 거만한 언사와 태도들 때문에 취리히 측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바덴 논쟁 후 베른 시에서는 개혁의 입장이 우세해지기 시작했고, 시당국에서는 종교개혁에 대한 명료한 입장을 찾기 위해 토론회를 개최하는데 이를 통해 쯔빙글리파가 바덴 토론회에서 입은 손실을 만회할 수 있었다. 이 논쟁은 개신교측의 가르침에 정당성을 부여했으며, 개혁파가 스위스 국내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 되었다. 베른 논쟁의 결과는 몇몇 스위스 연방의 도시들을 개혁으로 전향하는데 유리하게 작용했다.

 

5. 쯔빙글리와 루터

쯔빙글리와 루터는 많은 문제에서 본질적으로 일치하였으나, 그들은 기질적으로 서로 달랐다. 쯔빙글리는 루터의 초기 저작에서 많은 것을 배우기는 하였지만 루터와 강조점은 달랐다. 루터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죄 용서와 하나님과의 화해 안에 있는 자유의 삶이었으며, 쯔빙글리에게 있어서 그것은 더 나아가 성경에 제시된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삶이었다.

 

기독교 교리에 있어서 두 사람간의 가장 다른 점은 성만찬 해석이었다. 루터에 있어 그리스도가 서안에서 이것은 나의 몸이다.”고 한 말은 문자적으로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실제적으로혹은, “본질적으로봉헌된 떡과 포도즙에 임재하고, 떡과 즙에 참여하는 모든 이에 의해 - 죄 용서에 의해 구원에 이른 신자이든, 저주에 이른 불신자이든 - 진짜로 받아들여진다고 가르쳤다.

반면 쯔빙글리는 이것은 나의 몸을 의미한다.”가 정당한 해석이라는 코르넬리우스 호엔의 주장에 힘입어 이미 그러한 경향을 보이던 이 말씀에 대한 상징적 이해를 강화시켰다. 쯔빙글리는 성찬에서 어떤 그리스도의 육체적 임재도 부정했으며, 떡과 잔이 아닌 믿는 이들의 마음속에 확실히 영적으로 임재하신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대립된 해석은 1526년 격렬한 문서 논쟁을 유발시켰다.

쯔빙글리가 보기에 루터의 그리스도의 육체적 임재 주장은 불합리한 가톨릭 미신의 잔재였으며, 루터에게 있어서 쯔빙글리의 해석은 이성을 성서의 단순한 말씀위로 높이고,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실을 부정하는 죄스러운 것이었다. 루터는 속성 간의 교류라는 전통적인 기독론 교리에 호소하여, 그리스도의 육체적 임재가 수만은 제단에 동시에 임하는 것을 설명하려 하였다.

루터는 쯔빙글리와 그의 지지자들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선언했고, 쯔빙글리 또한 루터가 로마의 대변자 요한 엑크보다 더 나쁘다고 주장했다. 쯔빙글리의 이러한 주장들은 독일어권 스위스뿐만 아니라 남서 독일의 많은 지역의 동의를 얻었으며, 이러한 복음주의 진영의 분열에 대해 로마 가톨릭측은 기뻐하며, 루터 안에 가톨릭적(전통적) 요소를 강조함으로 이들 사이의 분열을 더욱 조장하였다.

 

 

6. 쯔빙글리의 신학

1) 신론

쯔빙글리의 신학은 루터처럼 하나님의 계시인 그리스도론에서 출발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초월성과 섭리에 대한 반성에서 시작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과 인간을 절대적으로 구분하였으며,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적인 신학을 전개했다. 또한 예정과 자유의지와 공로의 전반적인 운영은 섭리에 의존하고 있다.

쯔빙글리는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에서부터 예정을 추론했다. 하나님은 지고선으로서 그의 신론의 출발점을 이룬다. 그는 바울이나 루터의 십자가 신학을 근거로 하나님의 공의와 은혜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고, 안셀름의 만족설을 수용하면서 하나님의 공의가 하나님의 은혜에 종속되며,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공의와 더불어 하나님의 은혜가 충분히 실현되었다고 보았다. 쯔빙글리 예정론의 강점은 구원의 문제를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에 근거지음으로써, 그리스도의 희생의 보편주의는 경건한 이방인을 향해 확장된다. 선택은 신앙의 귀결이 아니라 신앙이 선택의 귀결이다. 선택되지 않은 자들은 믿을 수가 없다. 신앙은 선물이며, 신앙의 선행은 인간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열매 맺는다.

 

2) 그리스도론

쯔빙글리의 기독론적 사고는 먼저 그리스도를 우리의 교사요 모범으로 파악하는 데서 두드러진다. 15231차 취리히 논쟁에서 그는 그리스도를 유일한 구원의 길로 제시하고 있다. 그는 만족설을 택하고 있는데, 이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는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켰다는 것이다.

쯔빙글리의 기독론적 특징들을 훗날 루터와의 성만찬 논쟁에서 재현되는데, 이는 그리스도의 육신적인 몸은 주의 만찬에 임재할 수 없으며, 편재하는 것은 그분의 신성이라는 쯔빙글리의 주장에 대해 루터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일치함으로 그리스도의 신성이 있는 곳에 그분의 인간적인 몸이 같이 임재한다고 주장함으로 양자간에 대립하게 된다.

쯔빙글리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인간성은 신성에 대한 지나친 강조 때문에 뒷전으로 밀려난다. 그리스도의 인간성은 우리가 쫓아야 할 모범으로 더 의미가 있다.

 

3)성령론

쯔빙글리의 삼위일체론은 어거스틴의 경륜적 삼위일체론에 가깝다. 그의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의 일치성에서부터 시작한다. 성령과 그리스도와의 밀접한 관계를 강조했는데, 성부와 더불어 이들은 세상을 창조하며 모든 것을 유지한다고 보았다. 오순절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오신 성령은 백성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으로 인도하지만, 성령이 그리스도에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이미 성령은 삼위일체의 한분 하나님으로 태초이전부터 존재하고 계셨다.

성령은 사람들이 성서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성령은 말씀을 통해 역사하지만, 말씀에 매이지 않는 독자적인 창조적 사역을 하신다. “우리는 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가르침을 받으며, 내적으로는 성령에 의해 각성된다.”는 쯔빙글리의 주장을 보더라도 우리는 무리 없이 그를 성령의 신학자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4)영성과 사회정의

쯔빙글리에게서 성서의 가르침으로 돌아가려는 사고와 교회개혁은 동시에 사회개혁을 필연적으로 동반한다. 쯔빙글리는 항상 자신의 사역을 성령의 빛에서 이해했다. 그의 사역의 역동성은 말씀을 소중하게 여기면서도 동시에 성령의 주권적인 사역을 제한하지 않는데서 있다. 그는 성령론적으로 자신의 종교개혁과 사회개혁을 생각했다.

쯔빙글 리가 열광주의자로 비판받는 이유는 그의 보편주의 때문이지만, 그의 보편주의는 철저히 성령론과 성서에 기초하고 있다. 쯔빙글리에게서 영성의 개인적인 차원은 거룩한 산제사로 살아가는 영성의 사회성을 강화한다. 이것은 기독교의 세속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속에서 복음을 심고 실천하며 살아가는 복음의 사회성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써 교회는 단순히 건물로 인식되는 것이 아니며, 그들에게는 사회와 정치적인 영역 속에서 구체적인 책임과 의무를 갖는다.

 

5)세례와 성만찬 논쟁

쯔빙글리는 세례, 재세례, 유아세례에 관하여에서 로마 가톨릭과 급진주의자들로부터 날카롭게 갈라섰다. 가톨릭의 전통적 교리는 세례에 사용되는 물에 죄를 소멸하는 권세를 부여하기 때문에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보았다. 쯔빙글리는 모든 외적인 사물은 인간을 깨끗케 하거나 의롭게 할 수 없다는 입장을 근거로 가톨릭과 루터에 의해 세례를 은총의 수단으로 보는 견해를 거부했다. 그는 세례와 성만찬을 상징으로 보았고 그 자체로만은 아무런 효력을 끼칠 수 없다고 보았다. 또한 유아세례에 관해서는 성서에 명령하고 있지 않으며, 금지되어 있지도 않다고 보았다. 쯔빙글리는 계약개념을 통해 어린이들은 하나님께 속한다고 보았다.

쯔빙글리는 성만찬에 대한 이해로 루터와 단절하게 된다. 쯔빙글리는 성만찬에서 빵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동일시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표상한다는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이것은 빵과 포도주에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실제로 임재한다는 루터의 견해와 상충하는 것이다.

그러나 쯔빙글리는 성찬에 구원의 은사가 현존한다는 것을 단순히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는 그리스도의 임재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회상하도록 신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불러일으킨다고 보았다.

루터에게서 성만찬의 실제적 임재는 믿음을 강화하며 죄를 용서한다. 그러나 쯔빙글리는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육체적 임재를 믿음과 성서로 공격했다. 성찬이 아니라 믿음이 구원으로 인도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쯔빙글리의 성만찬 이해는 그의 노년에 변화된 입장을 취하게 된다, 그는 성만찬 시행에서 빵과 포도주는 내적 인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이러한 요소들은 성만찬에 참여한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해 준다는 입장을 취했다. 후기에 나타나는 강조점의 변화는 그리스도의 실제적 임재를 향해 개방한다.

이러한 루터와 쯔빙글리의 성만찬 이해의 차이는 교회의 분열을 가져올 만큼 심각한 것은 아니었고, 단지 역사적인 오해와 정치적인 배경이 작용했던 것이다.

 

 

7. 쯔빙글리의 시대적 의미

15311023일 가톨릭 주들이 개신교측에 가한 야간 공격은 취리히의 군사적 패배를 확정짓는 것이었다. 2차 카펠 평화협상에서 연방 주들은 예전의 동맹관계를 갱신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취리히 정부는 이 협상의 주요 내용들을 받아들이면서 향후 목사들이 정치적 간섭을 배제할 것을 못 박았다. 평화 협상으로 취리히정부가 무기력해지자 종교개혁의 중심은 베른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러나 취리히는 쯔빙글리의 제자이며, 그의 후계자인 볼링거의 탁월한 노력과 헌신을 통해 여전히 개혁의 중심지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또한 쯔빙글리의 죽음에 대해 볼링거와 그의 추종자들은 쯔빙글리의 죽음이야말로 그가 취리히에서 행한 교회와 도덕적 삶의 갱신의 연장선에 서 있었고, 사회적 책임의 모범을 보여주는 순교로 해석했다.

 

쯔빙글리의 종교개혁은 스위스 종교 사회주의자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레온하르트 라가츠를 통해 가난한 자들을 위해 우뚝 서 있는 하나님의 예언자, 그리고 로허를 통해 심오한 신학자, 특히 그의 기독론이 신론과 사회 윤리적 관심의 토대임이 밝혀지기 시작했다. 그의 복음의 해방적 차원은 20세기 초 스위스 신학자인 레온하르트 라가츠와 칼 바르트에 의해 주목되었다. 1917년 라가츠는 새로운 스위스에서 윌슨의 민족자결권을 받아들이면서 쯔빙글리 정신에 근거하여 스위스 연방 사회민주주의의 기반을 강력하게 요구 했다. 그리고 칼 바르트는 루터와 칼빈의 영향을 수용하면서도 이 두 종교개혁자들의 약점을 넘어서는 쯔빙글리의 에큐메니컬 신학과 정치신학을 매우 소중하게 받아들였다.

 

쯔빙글리는 복음의 자유로운 설교를 위해 평생을 두고 헌신했고, 투쟁했으며 또한 순교 당한 것이다. 인간의 전체적인 삶의 영역에 관하여 오시는 하나님의 정의는 여전히 오늘 우리에게도 복음의 요구 앞에 바로 서게 한다. 이것은 단지 쯔빙글리 당대의 문제가 아닌 바로 오늘 우리의 문제이기도하기에 쯔빙글리에 대해 더 많이 말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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