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종교로 보는 ‘죽음의 의미’ (존 바우커), 힌두교와 죽음
2. 힌두교와 죽음
여러 종교들 중 다양성에 대한 긍정은 힌두교에서 가장 현저하게 나타난다.
힌두교에서는 상이한 역사와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이 그런 역사와 환경을 보다 바람직한 결과로 전환시키는 데에 있어 각각에 상응하는 다양한 기회들을 필요로 한다는 점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는 마치 산의 정상에 오르는 많은 길이 있는 것과 같다. 또한, 어떠한 개인도 대상의 전체를 볼 수는 없으며 전부를 이해 할 수는 없다고 여긴다.
힌두교는 어떻게 하면 각자의 길에 맞게 살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다루는 하나의 지도이며, 각자의 상이한 환경 속에서 스스로를 어떤 식으로 발견하든 간에 이런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궁극적으로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길을 묘사해 보여주고 또 상기시킨다. 이것이 바로 《바가바드 기타》(이하 《기타》)의 핵심적인 주제이다.
《기타》에서 다르마와 관련된 근본적인 주제는 죽음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기타》의 주요부분들은 아르주나의 태도에 대한 크리슈나의 반응으로 구성되어져 있다. 양심의 가책을 느껴 전쟁을 거부한 아르주나의 태도에 대해 크리슈나는 그가 죽음에 대해 잘못된 중요성을 부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크리슈나에 의하면 육신을 입은 자아는 영원한 것이고 따라서 몸이 죽는다 해도 자아는 죽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마치 옷이 낡고 닳으면 그 옷을 벗고 새 옷을 입는 것과 같이, 육신을 입은 자아 또한 낡은 몸을 버리고 새로운 몸을 입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죽음은 아무도 막을 수 없으며 또한 이를 슬퍼해서도 안 된다. 이렇듯 자아란 죽지 않으며 영원하다는 사실을 깨닫는고 그런 지혜의 상태를 획득할 때 ‘브라만’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다.
《기타》에 의하면 죽음을 통해 자유로워진 자아는 크리슈나에게로 가서 크리슈나와 동일한 존재 양식으로 살게 된다. 이때 물론 크리슈나와의 차이성은 계속 남아 있다. 니르바나는 이처럼 크리슈나와 영원히 함께 거하는 지복과 평화의 상태를 가리킨다. 여기서 니르바나는 불교의 니르바나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현상 세계에 얽매여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자아는 자유에로의 길을 찾아내기까지 되풀이하여 태어난다. 《기타》는 이런 자아들이 따라야 할 길을 가르쳐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며 도덕적 삶에는 동일한 원인에 대한 동일한 결과를 낳는 ‘카르마’의 법칙이 존재한다. 여기서 나쁜 카르마를 쌓지 않기 위해서는 집착함이 없이 적합한 행위를 해야 하며 그렇게 할 때 윤회의 기나긴 반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끊임없는 윤회 속에서 불변하는 것은 오직 브라만이며, 죽지 않은 채 불멸하는 것도 브라만이다. 브라만은 ‘아트만’으로서 인간의 모습으로 현존하고 있는 것이다. 부단한 윤회의 흐름 속에서 더 고귀하게 태어나느냐 혹은 더 비천하게 태어나느냐 하는 것을 결정하는 것은 바로 카르마이다. 행위로 규정한 카르마는 결과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행위이기도 하다. 즉, 과거에 행한 행위의 결과로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해방을 지향하는 길’로서 《기타》에서는 요가를 말하고 있다. 요가는 여러 가지 형태를 띠지만 본질적으로 흩어진 자아를 참된 자아, 통합된 자아, 하나의 자아로 회복시키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요가는 목적이 아니라 그 목적에 이르기 위한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힌두교의 관점에서 죽음은 결코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죽음은 단지 사건의 기나긴 과정 안에서 하나의 준비 단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은 이슬람교와 대조를 이룬다. 이슬람교에서는 오직 한번의 죽음이 있고 그 다음에는 심판이 있지만 힌두교에서의 죽음은 그 다음 출생으로 넘어가면서 무한하게 반복되는 것이다.
사자의 영혼은 죽음의 순간에 실제로 스스로 자신을 도울 수도 있고 혹은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고 믿기에 힌두교인들에게 죽음의 순간 혹은 죽음의 사건은 매우 중요하다. 죽음의 순간에 자아가 가장 원하는 형태에 정신을 집중함으로써 다음 생에 태어날 형태에 영향을 미칠 수가 있다. 신(브라만)에게 집중하는 능력은 확실히 평생에 걸쳐 요가를 실천한 자에게 훨씬 더 많다.
인도 전통에서 가장 초기의 기록들은 죽음에 대한 탐구에 있어 《기타》와는 매우 상이한 관점을 보인다. 인도의 종교전통의 초기 문헌은 《베다》인데, 여기서는 재생의 이론은 나타나지 않으며, 재죽음의 이론은 매우 초기 단계에 나타나있다. 베다 시대에는 쾌락주의가 주도적이었으며 당시 사람들은 죽음이 가능한 한 오랫동안 연기되었으면 하는 소망을 갖고 있었다. 베다적 견해에 있어서 죽음이 연기된다 해도 그것은 영원한 것은 아니며, 한 개인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그들의 원천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사티’는 죽은 남편의 화장터에서 미망인이 자기 희생하는 것을 뜻하며 이를 통해 남편의 죄를 씻어 낸다고 믿었다. 이는 생자가 사자를 도울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힌두교에 있어서 신들이라고 해서 죽음을 면하지는 않는다. 그들도 죽음을 저지하고 그들 자신의 불멸성을 획득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신들은 죽음에 저항하기 위해 ‘소마’라고 하는 조력자를 가지고 있다. 소마는 베다시대의 희생 제의에서 신들에게 바쳐지던 중요한 신주였으며, 소마는 강력한 마약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이것이 무엇인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며, 베다적 신앙에서 소마는 문자 그대로 불멸의 약이었다. 인도에서 중요한 모든 것들이 그러하듯이 소마 또한 신으로 인격화되어 있다. 단순히 일개의 신이 아닌 베다에 나오는 신들 중 가장 중요한 신들의 하나이다.
신들은 이런 소마신을 통해 혹은 다른 노력을 통해 죽음을 저지한다. 이는 인간 또한 불멸에 이를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을 내포하기도 한다.
이렇듯 가장 초기 시대에는 《기타》라든가 《우파니샤드》가 이해한 것과 같은 그런 불멸성에 대한 것은 거의 나타나고 있지 않으나, 후대의 윤회와 재생에 관한 교의에 매우 근접한 죽음의 반복이라는 기본적인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아직 재생에 관한 언급은 나오지 않으나 이러한 구도는 지속적인 경험 주체 즉 아트만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베다적 이해와 후대의 이해 사이의 실제적인 연결 고리는 브라만과 동일시된 아트만에서 기대되지는 않으며, 사실적인 측면과 이론적인 측면 모두에 있어 의례 및 희생 제의야말로 연결 고리를 제공해 준다.
다르마 즉 개별적인 현상들이 제각기 최대한 각자에게 맞는 길을 추구하는 것을 중시하는 이러한 관념 밑에는 하나의 통일성이 놓여져 있다. 자아는 결코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는다. 이는 무에서 생겨났으며 아무것도 낳지 않았다. 이러한 자아에 대한 사실을 깨달아 브라만을 얻었다면 그는 죽음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며, 이러한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은 출생과 죽음으로 특징지어지는 삶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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