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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dy/사회복지

'우리 역사 최전선' (박노자, 허동현 저) 정리 part1

by 망고를유혹하네 2023. 7.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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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역사 최전선’을 읽고 part1

 

 

 

-저자소개

박노자

러시아인이지만 누구보다 한국적인 사람, 그리고 한국인보다 한국을 잘 알고, 한국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 그가 바로 박노자이다.

한국을 사랑해서 2001년에는 한국인으로 귀화한 이젠 진정한 한국인이다. 진보주의를 추구하는 박노자는 당신들의 대한민국’, ‘우승열패의 신화등 많은 서적을 집필하였다.

 

허동현

방법론과 시각을 달리하는 한국 근대사학계의 양대 산맥 강만길 선생님과 유영익 선생님에게 지적 세례를 받았으며, 고난과 굴곡으로 점철된 한국 근·현대사에서 희망을 찾아내는 것이 주된 관심사로 제2공화국 국무총리 운석(雲石) 장면(張勉)의 연구에 심취해 있는 허동현은 스스로를 건강한 보수주의자로 칭한다.

그의 저서로는 일본이 진실로 강하더냐’, ‘근대한일사연구등이 있다.

 

 

-책을 읽고 난 후..

스스로를 건강한 보수주의자라고 말하는 허동연, 그리고 어쩌면 한국인보다 한국을 아니 한국인을 더 잘 아는 개인주의적 진보주의자박노자, 두 사람의 논쟁이 우리의(사실 우리라기 보단 나의) 무관심 속에 잊혀져 가는 역사의 단면들을 꺼내어 주었다.

보수와 진보첨예하게 대립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 했었는데, 두 저자의 보수니, 진보니 하는 말은 단지 각자의 시각일 뿐이요, 결국 지향하는 바는 동일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혹자는 이 책에 대한 서평에서 두 사람의 조금 더 대립각을 세우지 않았던 점에 대하여 아쉬워하지만, 본인은 각각의 시각이 다를지라도 그 지향점은 같아야 한다는 것에 동의한다.

 

 

서설 역사는 반복되는가

 

두 사람 모두 역사가 반복되고 있다는 것에 동의하고 있다. 특히, 100년 전 그때 그곳의 모습이 지금 여기의 모습과 너무나 비슷하다는데 동의하고 있다.

100년 전 서구 열강과 청, 일이라는 고래들 사이에 있던 한반도와 지금 현재 미국과 중국이라는 고래 사이에서 앞으로의 행보를 고심해야 하는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닮아 있다.

 

박노자 교수는 100년 전 중국 패권 이후를 대비하지 못했던 한국의 모습을 돌아보고, 현재 패권을 잡고 있는 미국 그 이후를 준비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지식 중심의 미래형 경제로의 변화에 적응하며,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외부적 변화에 적응하는 것 뿐 아니라, 우리 내부에 만연해 있는 부패한 모습들을 정화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미국과 중국의 대립상황 속에서 한반도를 중립화하여 100년 청.일 전쟁의 전쟁터로 국토를 내주었던 과오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고 충고하고 있다.

 

반면 허동연 교수는 100년 전과 흡사한 모습을 하고 있음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100년 전 한반도가 열강들의 각축장이 되었던 것에 있어, 먼저 우리 내부에서 그 원인을 찾고 있다. 그리고 그 원인을 당시 부정직했던 우리 정부에서 찾고 있다.

또한, 미국 이 후의 새 시대를 준비해야 한다는 박 교수의 견해에 대해서는 현실적으로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말한다.

 

 

1. 윤치호와 영어 배우기

[박노자]

박노자 교수는 먼저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무분별한 영어 배우기 열풍에 대하여 비판하며, 영어를 배우기 위한 각고의 노력에도 미국 사회의 일원이 될 수 없음을 꼬집고 있다.

박 교수는 윤치호의 이야기를 통해 그의 주장에 대한 근거를 찾고 있다.

윤치호는 천재적 어학 실력을 갖고 있었다. 그는 상당히 고급 수준의 영어를 구사했을 뿐 아니라, 미국에 온지 1년여 만에 영어로 일기를 썼을 만큼 천재적인 어학 실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윤치호는 완벽하게 영어를 구사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우리라는 울타리에 편입될 수 없었다. 그는 황인종이라는 이유로 백인 선교사에게 따돌림을 당해야 했다.

100년 전 미국인이 되고자 했던 황인종 윤치호, 그는 결국 마음에는 상처만이 남게 되었고, 이것이 윤치호라는 친일자를 만드는데 하나의 역할을 했다고 박 교수는 말하고 있다.

박 교수는 미국에게서 배울 것은 배워야 하지만, 무분별한 미국에 대한 의존과 지나친 친미는 결국 100년 전 한 어학 천재처럼 가슴에 상처만을 남기게 될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허동현]

한편 허동현 교수는 윤치호를 일본 만화 요괴 인간에 비유하고 있다. 인간이 되길 소망하며 악과 맞서 선을 행하는 요괴 인간, 그러나 언제나 인간들에게 배신을 당했던 요괴 인간, 허 교수는 윤치호가 이러한 요괴 인간과 닮았다고 말한다. 서자 출신이었던 윤치호에게는 미국은 신분 상승의 기회였을 것이나 그곳에는 자신이 설 자리는 없었고, 결국 윤치호는 자신과 같은 요괴 인간들이 모여 사는 일본을 대안으로 선택했다는 것이다. 허 교수는 이러한 무분별한 미국 따라 하기는 결국 윤치호처럼 깊은 상처만을 남기게 될 것이라는 박 교수의 의견에 동의하고 있다.

그리고 그 해답으로 유길준을 제시하고 있다. 유길준은 당시 과거시험에 대하여 비판하며 영어와 기독교를 깊이 공부했지만, 전통적인 가치관을 포기하지 않고 조선의 개혁을 통해 백인들의 문명을 따라잡을 수 있다는 견해를 갖고 있었다. 허 교수는 유길준의 극단적인 패배의식에 휩싸이지 않고, 활발한 저술 활동을 통해 자신의 식견을 동포들과 공유하는데 힘쓴 것에 대하여 높게 평가하고 있다. 허 교수는 미국에 대해 객관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데 있어서 박 교수와 그 뜻을 같이 하며, 더불어 허교수는 한국과 미국의 관계를 침략자와 비침략자로 보는 시각에서는 탈피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나의 생각]

첫 장을 읽고 느낀 것은 박 교수나 허 교수 모두 친미냐, 반미냐의 입장이 아닌, ‘미국이라는 현실 앞에 우리가 지향해야 할, 그리고 지양해야 할 부분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다만 박노자 교수의 미국이 남한을 북한과 중국에 대한 침략의 발판으로 삼을 것이라는 주장은 너무 극단에 치우친 상황설정이 아닌가 생각된다. 분명 한국에 주둔한 수만명의 미군이 북한과 중국을 견제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나의 눈에 보이기엔 그저 견제 그 이상은 아닐 듯하다.

 

미국이라는 나라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나로 하여금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든다.

한해에도 수많은 학생들이 미국으로 유학을 간다. 미국의 어느 학교는 한국인이 반이상인 곳도 있다고 한다. 무엇이 그토록 그들을 부르는 것일까?

이유 없고, 목적 없는 미국 유학, 그것은 미국에 대한 막연한 동경에서 오는 것 같다.

그 막연한 무언가가 그들을 부르는 것일까?

우리가 이토록 동경하는 미국, 미국만큼 무서운 나라가 또 있을까?

그들의 웃음 뒤에 숨겨진 칼날이 때론 썸뜩함마저 불러온다.

그러나 그 칼날을 알고도 그들의 손을 놓을 수 없다는 우리의 현실이 가슴 아플 뿐이다.

우리는 미국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다. 아니 많은 정도가 아니라 지나칠 정도로 많이 배웠고 때로는 배움을 강요당하기도 했다.

이제는 무분별한 미국바라기를 버리고, 주체적인 시각으로 미국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2. 도나스와 도너츠의 차이

[박노자, 허동현]

개개인의 개별적 권리를 뜻하는 인권을 인민의 권리를 민권, 즉 인민이 참정권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로 오역함으로 일본이 전체주의로 나아가게 되었다고 한다.

사회적, 문화적 배경을 달리 하는 서구의 지적 산물들을 일본이 쉽게 이해할 수 없었음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중역되고 오역된 것을 받아들여야 했던 우리선조들이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었음은 당연한 것이다.

일본을 통해 받아들여진 근대, 그리고 우리 사회 곳곳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일본식 번역들이 문제라는데 허동현 교수와 박노자 교수 모두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나의 생각]

그냥 싫은 나라’, 우리나라 국민 대다수는 그냥 이유 일본을 싫어한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일본을 싫어하는 구체적인 이유는 없다. 그냥 싫다고 한다.

그러나 그토록 싫어하는 일본의 굴레를 아직 벗어나지 못했음을 볼 때, 때론 답답한 마음마저 들게 된다.

아주 사소한 단어 하나를 통해 우리는 정체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3. 빈 라덴과 최익현

[박노자]

박노자 교수는 기독교의 한 운동이었던 근본주의라는 말을 이슬람 단체들에게 사용한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기독교 근본주의는 이슬람의 전멸을 요구하지만, 이슬람 단체들은 단지 미국과 서구가 이슬람에서 행하고 있는 약탈행위와 이스라엘에 대한 지원을 중단할 것을 바라기 때문이라고 한다. 박노자 교수는 서구 열강의 비합리적이며 불평등한 무역을 비판하며, 그로인해 아랍권의 자원이 고갈하게 되었고, 빈곤을 가졌왔음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처럼 세계자본주의의 핵심부와 불평등한 자원 무역을 함으로써 자본주의가 발전되지 못한 주변주 사회가 황폐화된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 빈 라덴과 최익현이 흡사한 모습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또한 빈 라덴의 이슬람적 보편주의와 위정척사운동의 유교 윤리적 인류 보편주의에서 공통분모를 찾고 있으며, 자본주의 핵심부의 비윤리성과 비도덕성을 질타했던 것에 해하여도 빈 라덴과 최익현의 공통점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허동현]

그러나 허동현 교수는 빈 라덴과 의병지도자들을 동일선상에 놓고 평가 할 수 없다고 한다. 그는 빈 라덴이 민간을 대상으로 공격을 일삼은 것에 대하여 비판하며, 조선의 의병들은 그들의 공격 대상으로 일제의 군경과 군사시설물 그리고 침략에 책임 있는 자들만 응징했다는 점에서 그 차이점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선비들이 지키려고 했던 나라는, 구시대적이며 시대착오적인 것이었다고 비판하면서, 그들이 가졌던 명나라에 대한 사대적인 사고방식이 조선 사회 내부에서 근대화가 이루어지는데 걸림돌이 되었다고 보고 있다.

 

[나의 생각]

허동현 교수의 비판처럼 박노자 교수의 이슬람 단체와 위정척사파를 동일시하는 것은 나 또한 반대한다. 그 어떤 좋은 목적이 부당한 수단을 정당화 할 수는 없다.

분명, 현재 이슬람이 겪고 있는 상황이 부당하고, 억울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무분별한 민간에 대한 공격이 인정받을 순 없는 것이다.

 

 

 

4. 유교와 사회주의

[박노자]

박노자 교수는 19~20세기의 유교 사상가들 유교와 사회주의를 접목하려 했고, 당시 사회주의가 도덕적 당위로서 상당수 유교 학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되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박 교수는 마오쩌뚱의 사회주의를 유교적 부채의식에서 근간을 찾고 있다. 마오쩌뚱은 캉유웨이와 량치차오의 저서를 통해 그들의 유교적 이상주의를 꿈꾸게 된 것이다. 그리고 공자의 인정. 균분. 대동의 이념이 마르크스의 공산 관념과 유사하다는 궈모루의 주장에 동의하고 있다. 즉 동아시아인의 마음 바탕에 깔려 있는 유교의식이 서양 사회주의가 동아시아식 버전으로 자리 잡는 데 기여했다는 것이다.

 

[허동현]

반면 허동현 교수는 사회주의와 유교는 현실적으로 실현된 적이 없는 이상적 당위였음을 전제하고, 개신 유학자들이 지향한 것은 사회주의의 동양적 버전이 아니라 당시 강자였던 일본 따라가기였다고 말하고 있다. 허 교수는 조선의 개항 이 후 다수의 지식인들이 사회주의가 아닌 기독교를 택했음에 주목한고, 그들이 기독교가 한국의 현실을 타개해줄 동아줄로 생각했다고 말한다. 또한 허 교수는 박 교수가 주장했던 캉유웨이와 량치차오의 유보의 논리를 개발독재 논리의 원형으로 보고, 이러한 유교의 황혼을 일본식 근대국가로의 귀결로 이어진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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